日 왜곡 고교역사교과서 또 검정통과

  • 입력 2002년 4월 9일 16시 01분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의 '일본 고교 역사교과서 왜곡' 관련 기자회견 모습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의 '일본 고교 역사교과서 왜곡' 관련 기자회견 모습 <박영대기자>
지난해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에 이어 올해 왜곡된 한일 과거사를 담고 있는 고교 역사교과서가 9일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해 파문이 일고 있다.

문제의 교과서는 1986년 첫 검정을 신청했을 때 역사 왜곡 시비를 낳았던 ‘신편 일본사’로 이번에 ‘최신 일본사’(메이세이샤·明成社출판)로 이름을 바꾸면서 새롭게 ‘독도(일본명 다케시마·竹島)는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을 추가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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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단체 日 역사왜곡교과서 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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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교과서 문제 일지

이 교과서는 26종의 일본 고교 역사교과서 중 유일하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없어 그동안 끊임없이 문제가 됐던 교과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8일 가토리 요시노리(鹿取克章)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유감을 표시하고 강력히 항의했다.

외교통상부 추규호(秋圭昊) 아태국장은 가토리 공사에게 “권위 있는 역사적 증거와 지리적 사실, 국제법적 원칙에 비춰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고 강조하고 “한국 정부는 이 같은 입장을 계기가 있을 때마다 일본 정부에 확고하게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문제의 ‘최신 일본사’는 본문 마지막 페이지의 ‘현대 일본의 과제와 문화의 창조’란에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가 타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북방영토는 러시아에 점령된 상태이며, 한국이 시마네(島根)현의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또 중국 등이 오키나와(沖繩)현의 센카쿠(尖閣)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기술한 역사교과서로는 이 교과서가 두 번째이나 표현은 가장 강하다.

이 교과서는 이번에도 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으며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자위(自衛) 전쟁’으로 파악하는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 국가주의를 표방한 1890년의 ‘교육칙어’ 전문을 게재하고 있으며, 일본이 4세기 한반도에 진출해 백제 신라 등을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뒀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함께 검정에 통과한 다른 5종의 개정판 역사교과서는 군 위안부에 대해 그대로 실상을 기술했다.

이 교과서들은 5월 견본을 만들어 제출하고 8월경 지자체별로 열리는 교과서 전시회를 거쳐 채택 여부가 결정된다. 채택된 교과서는 내년 4월 신학기부터 사용된다. 문제의 ‘최신 일본사’는 15개교가 채택해 왔으며 수량으로 따지면 2400여권(채택률 0.38%)쯤 된다.

한편 일본의 시민단체인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는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최신 일본사는 지난해 문제가 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비판하고 “이 교과서를 만든 ‘일본회의’는 올 여름 이 교과서를 많이 채택시키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다”고 폭로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일본 역사교과서 개악-현상유지 내용
항 목현행본 개정본
독도관련없 음영토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가 타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북방영토는 러시아에 점령된 상태이고, 한국이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이름)의 영유권을, 또 중국 등이 오키나와현의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없 음없 음
임나일본부야마토 조정은…아직 통일이 안된 낙동강하류의 가라(加羅·任那)로 불린 변한제국에 진출하여 거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통일이 안된 낙동강하류의 加羅(任那)에 세력을 뻗친 것으로 생각된다.
임나 멸망512년에는…백제에 임나의 네 지역(현)을 할양했으나,백제가 임나의 네 지역(현)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다.
한일병합일본은 한국에 일한의정서를 맺도록 하여 한국영내에서의 일본군의 자유행동을 인정시켰다…일본은 한국을 압박하여 병합조약을 조인시키고 조선총독부를 두어 모든 정무를 통괄하게 되었다.일본은 한국영내에 있어서 일본군의 자유행동 인정을 내용으로 하는 일한의정서를 맺도록 하여…일본은 한국을 압박하여 병합조약을 조인시키고 조선총독부를 두어 모든 정무를 통괄하게 되었다.
일-러관계일본은…조선에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와의 대립이 깊어져, 전화에 휩싸였다.일본은…러시아에 승리하고, 드디어 한국을 병합했다.
3·1운동조선에서는 일한병합 이래 독립운동이 뿌리깊게 확대되고 있었으나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집회가 열려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곧 시위행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군대가 출동, 유혈참사로 변했다.조선에서는 일한병합 이래 독립운동이 뿌리깊게 확대되고 있었으나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집회가 열려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곧 시위행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며서 경찰과의 충돌도 있자 군대가 출동하여 유혈참사로 변했다.
간토대지진자경단 등이 다수의 조선인을 학살하는 비참한 사건도 일어났다.
극히 일부에서는 조선인을 보호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각지의 자경단 등이 다수의 조선인을 살해했다.
징병 징용한편 조선 대만에도 징병제가 확대 실시되어 청년이 전투에 참가한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징용되어 일본 각지의 탄광 등에서 일하였다.한편 조선 대만에서는 징병제가 실시되어 청년이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징용되어 일본 각지의 탄광과 공장에서 일하였다.
황민화정책조선에서는 1935년부터 조선어를 정규과목에서 제외하고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의 황민화정책이 행하여져 민족의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1935년경부터 조선 대만에서는 일본어교육이나 신사참배, 일본식 성명을 사용케 하는 황민화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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