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사관이 그렇게 하는 실제 이유는 직업이나 재산이 없는 미혼여성들이 방문비자를 자주 거부당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즉, 영주권을 이미 신청해놓은 사람들은 곧 영주권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방문비자를 발급하면 미국에 들어가서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눌러앉아 불법체류를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건국한 미국이 이민자들에게 서럽게 대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일’이라는 비판은 이미 다 아는 얘기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영주권신청자 방문비자 거절▼
만약 수년 전 미국에서 필자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필자도 피해자들을 줄줄이 모아 집단소송을 벌이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나가 악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나 소수민족 빈민들과 생활하는 동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나쁜 나라’였다.
이번 소송의 원고는 전종준 변호사와 그가 92년 미국으로 이민을 초청한 그의 동생 순덕씨다. 초청이란 해외에 거주하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뜻이다. 순덕씨는 92년 후에 미국 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고 미국에 사는 자신의 조카도 한번 본 적이 없다.
다른 한국인들은 방문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갈 수 있지만 순덕씨를 비롯한 많은 영주권 신청자들은 불법 체류의 위험을 이유로 방문비자가 일률적으로 거절되고 있다.
전 변호사에 대한 소개도 읽고 통화도 해 보았다. 외람된 얘기지만 한국에서 폭풍 같은 80년대를 겪은 분도 아닌 듯했고 미국에서 소수민족 권익을 위해 싸우는 투사라는 인상도 받지 못했다. 소장도 받아보았지만 미국에서 흔하게 시민단체를 통해 조직되는 집단소송도 아니었다.
소장의 내용도 절대로 정치적인 목적이나 심정적인 당위성의 발로가 아니었다. 전씨는 동생이 방문비자를 처음 거부당한 99년부터 무려 10차례에 가까운 서한을 통해 법이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에 대해 국무부 및 대사관의 관계 부서는 그때마다 서면답변을 해주었다.
기본적으로 이 서한들을 통해 미 국무부는 “영주권을 신청해 놓은 사람의 경우 한국과의 연고가 특별히 강력한 사람의 경우에 한해서만 방문비자를 발급한다”고 하여 영주권 신청자들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불리한 추정을 적용하고 있음을 자백하였다.
또 전씨는 동생 순덕씨의 국내 재산목록, 처남의 국내 고용기록 등을 이미 제출하여 위와 같은 정책상의 요건도 이미 증명되었다. 전씨는 어떤 단체의 힘도 빌리지 않고 법이 정한 절차를 꾸준히 밟아왔고 그 마지막 단계로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씨는 이 소송에서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의식화되어 있지도 않고 ‘조직’의 힘도 없는 개인이 국가의 한 부서인 사법부에 호소하여 합리적인 승소 가능성 있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만큼 권력에 대한 신뢰,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외부인에 초법적 공격 멈춰야▼
외부인에 대한 초법적 공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20세기에는 사상과 경제가 역사의 주요한 테마였지만 21세기에는 ‘공동체를 정의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담론이 될 것이라는 어떤 논문을 읽은 기억이 난다. 왜 ‘그들’과 ‘우리’를 명확하게 나누는 것이 중요해져야만 할까. 어느 나라의 법 체계도 정치한 이론으로 감싸지 못한 영역인 데 대해 겁부터 난다.
문득 미국에서 대학교 다닐 때의 단상이 떠오른다. 미국에서 타민족과 가장 잘 융합하지 못하고 우월의식에 휩싸여 몰려다니던 사람들은 백인들이 아니었다.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모아서 ‘자랑스러운’ 한인학생회장을 하고 다니며 미국 욕을 참 많이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 있는 나에게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나라다.
박경신 한동대 교수·법무법인 ‘한결’ 미국법 자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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