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비디오 레코더의 영문 약자인 DVR는 아날로그 신호로 된 화상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 저장하는 기술. 국내에서도 이 기술은 현관이나 은행창구 모니터 화면을 저장하는 보안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기술이 인터넷과 결합, TV방송 프로그램을 저장해서 시청자에게 전송하는 서비스로 발전했다. 방송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는 이유는 이 기술을 이용, 광고 없이 TV프로그램만 시청하는 가구수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 뉴욕타임스는 23일 “광고주들은 시청자들이 TV프로그램과 함께 광고를 본다는 전제로 거액의 광고료를 지불하고 있지만 DVR가 이 전제를 뒤흔들고 있다”고 전했다.
DVR의 이용원리는 간단하다. 방송사의 방송스케줄이 아니라 시청자 자신의 스케줄에 따라 시청하는 것.
예컨대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축구경기를 보고 있는데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이 배달됐다고 하자. 자장면을 받아드는 사이 안정환이 한 골을 넣었다. DVR 시청자는 이 장면을 놓칠 위험이 전혀 없다.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그때부터 다시 경기가 시작된다.
실제 경기시간과 30분 이상의 시차가 있긴 하지만 실제 방송시간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에 TV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비디오 카세트 레코더(VCR)와 달리 시청자 자신이 예약 녹화하거나 테이프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프로그램 앞뒤나 중간에 귀찮게 따라붙는 광고를 모두 편집해버릴 수도 있다. 실제 이 서비스 가입자의 20%가 전혀 광고를 보지 않는다.
미국에서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티보(TiVo)와 리플레이TV사 두 곳. 미 전체 가구수의 1%인 100만가구가 가입돼 있다. 가입자들은 VCR와 같이 생긴 DVR 한 대를 사야 하는 데 하드디스크 저장용량에 따라 195달러(26만원 상당)에서 1999달러(260만원 상당)까지 다양한 비용이 든다. 한 달 접속료는 12.95달러(1만6000원 상당).
미 방송업계는 이 서비스의 설치가 까다롭기 때문에 DVR의 위협을 과소평가해 왔다. 그러나 시장조사기관인 포레스터 리서치는 향후 5년 내에 미 전체가구의 절반가량인 5000만가구가 이 서비스에 가입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광고주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 전국광고주협회의 대니얼 제프 수석 부회장은 “이 문제는 더 이상 이론적 가설이 아닌,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실제상황”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일부 광고주들은 벌써부터 TV방송사에 TV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아니라 광고시청률을 따로 조사해 보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TV방송사들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사태. CBS와 NBC, ABC, 폭스 TV사는 리플레이TV의 신모델 출시를 막기 위해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델은 시청자가 편집할 필요도 없이 버튼 하나로 광고를 건너뛸 수 있다. 과거에도 TV방송사들은 VCR가 처음 등장했을 때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바 있다. 설령 승소한다고 해도 여전히 시청자들의 광고편집 기능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뉴욕타임스는 “TV방송사들은 이제 더 이상 광고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시청자들로부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새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보도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