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줄테니 '술시합' 방송해줘"

  • 입력 2002년 6월 1일 22시 31분


《미국에서 광고주의 입김이 세지면서 광고가 TV 프로그램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공중파 TV방송을 비롯한 미국 미디어 업계는 지난해부터 2차대전 이후 최악의 광고 불황을 겪으면서 광고주의 무리한 요구에 굴복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달 31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지던 프로그램과 광고의 벽이 무너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고주를 유치하기 위해 공익에 위배되는 프로그램까지 제작되고 있다.》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뉴스코퍼레이션 산하의 FX 케이블TV는 8일 밤 10시반(현지시간) 젊은 남녀로 구성된 세계 16개팀이 맥주를 빨리 이어 마시기 시합을 벌이는 ‘월드 비어 게임’을 방송할 예정이어서 거센 윤리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저널은 전했다.

이 프로그램은 벨기에의 맥주회사인 인터브루와 비어닷컴 그리고 숏팬티 차림의 웨이트리스가 맥주를 나르는 술집체인점인 후터스가 후원했다.

3월초 로지 오도넬은 자신의 토크쇼에서 패스트푸드회사인 웬디스에서 사먹을 수 있는 ‘훌륭한 샐러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나오지 않는 PD로부터 갑자기 이 샐러드를 먹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오도넬씨가 “내가 먹어야 할 무슨 이유라도?”라고 묻자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는 포크로 상추를 집어 입어 넣은 뒤 “음, 맛있군”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웬디스와 이 토크쇼를 제작한 워너브러더스의 소속회사 AOL타임워너의 계약서에 나와 있다. 웬디스는 2300만달러의 광고료를 주는 조건의 하나로 토크쇼의 호스트가 방송 중에 샐러드를 먹을 것을 요구했다고 이 신문은 지난달 9일 보도했다.

이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TV쇼에서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거나 드라마에서 눈물을 흘리는 두 남녀 사이에 크리넥스 티슈가 유독 카메라에 잡히는 장면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정보통신 회사인 베리즌의 광고캐릭터 ‘토크맨’은 TV광고에서 미국 곳곳을 다니면서 “내 말이 들리냐”고 선전한다. 지금은 NBC방송의 드라마 ‘프레이저’나 ABC방송의 영화 안내프로그램에도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한국에서는 방송법으로 금지돼 있는 이 같은 ‘간접광고’가 미국에서 최근 버젓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광고시장이 18개월째 침체돼 있는 탓도 있지만 광고대행사들의 힘이 세진 영향도 적지 않다.

광고대행사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8개의 대형회사로 재편됨에 따라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광고업계로 기울었다. 마인드쉐어 등 8개사는 미 전체 광고매출의 80%를 대행하고 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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