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배상요구에 ‘분노 폭발’…사우디, 美서 2000억달러 회수

  • 입력 2002년 8월 21일 18시 32분


미국 부시대통령(왼쪽), 사우디 파드국왕
미국 부시대통령(왼쪽), 사우디 파드국왕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수천억달러가 미국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를 두고 21일 ‘엑소더스(대탈출)’라 명명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투자 분석가들을 인용, “사우디가 최근 1000억달러에서 2000억달러의 자금을 이미 회수했다”고 보도했다.

엑소더스의 원인(遠因)은 미 경제의 침체로 미국 내 투자의 수익률이 낮아졌기 때문.

그러나 무엇보다 9·11 테러 희생자 유족의 천문학적인 집단소송이 이 ‘분노의 역류’를 촉발시키고 있다.

미국의 희생자 유족 600여명은 15일 사우디의 왕가와 사우디 최대의 내셔널 커머셜 뱅크 등 은행, 국제이슬람구호조직 등 자선단체가 9·11 테러의 배후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했다면서 1조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소송의 결과에 따라서 사우디의 미국 내 투자자산이 동결되거나 몰수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자금을 빼내고 있는 것.

그러나 단순히 소송 때문만은 아니다. 사우디는 이번 소송이 지난 달 10일 미 국방부내 최고위 정책자문그룹인 국방정책위원회(DPB)에서 있었던 브리핑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의혹을 품고 있다. 당시 브리핑을 한 랜드연구소의 노랜트 무라빅 연구원은 “사우디가 미국의 ‘적’으로 간주돼야 하며 필요시 사우디의 유전과 미국내 자산도 몰수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같은 소송이 미국 내 자산 몰수로 가는 전단계가 아니냐는 것.

이번에 피소된 은행 중 하나인 알 라지 투자개발 은행 대변인은 “소송은 미국 내에 저축돼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자금을 쫓아내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현재까지 사우디가 미국 내 투자한 액수는 주식, 채권 부동산 등에 유입된 자금을 포함해 총 4000억∼6000억달러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미 미국 내 외국인투자가 2000년 3010억달러에서 지난해 1240억달러로 격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우디의 투자자금 회수는 미 경제에 중대한 위협이 될 전망.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우디 투자자들이 미국 내 계좌의 완전 폐쇄까지는 고려치 않고 있지만 회수자금을 유럽 계좌로 이동시키고 있다”며 “이는 달러화 하락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로서는 민간인들의 소송에 간여할 수 없기 때문에 사우디계 자금 이탈에 속수무책인 상태다.

지난 60년간 전략적 동맹이었던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9·11테러를 일으킨 범인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출신으로 판명남에 따라 냉각되기 시작, 최근에는 사우디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시 협력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함으로써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국은 사우디 정부가 알 카에다를 비롯해 테러조직을 단속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불만을 품고 있다.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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