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4도의 쌀쌀한 날씨 속에 마라톤에 도전한 러년은 계속 여자부 선두그룹과 함께 레이스를 펼쳤다. 16㎞ 지점에선 옆의 선수와 발이 엉켰으나 다행히 넘어진 선수는 없었다. 대회조직위측은 앞을 보지 못한채 달리는 그녀를 위해 자전거를 탄 조력자를 그녀 뒤에 배치해 언제 커브가 나오는지, 그녀의 물통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중간기록은 어떤지를 소리쳐 알려주도록 배려했다.
마라톤 선수로는 큰 키(1m70)인 러년을 알아본 관중들이 박수로 격려하는 가운데 그녀는 '톱10과 2시간30분 이내 골인'의 두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한동안 거친 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그녀는 지친 기색없이 "생각보다 짧았다"면서 여유를 보였다.
9세때 망막 퇴행성 질환으로 시야가 어두워지고 앞이 보이지 않게 된 러년은 정상인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해 1500m에서 8위를 차지했다. 작년엔 실내 5000m에서 미국신기록을 세웠고 실외대회 5000m에서도 우승하는 기적을 이뤄왔다. 이번 첫 마라톤을 앞두고 3개월전 결혼한 코치 매트 로너건과 집중 훈련을 해왔다.
뉴욕마라톤을 통해 그녀가 이룬 또하나의 목표는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 말해온 것을 스스로 실천하는 것. 시각 청각 장애인 교육을 전공해 학사 석사 학위를 갖고있는 러년은 어린 장애인들에게 "이루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늘 말해왔다.
지난주 뉴욕 브롱크스의 특수학교 학생들이 베풀어준 응원파티에서도 러년은 장애인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것, 하고싶은 것, 너희들도 모두 할 수 있단다. 누구한테서도 '너희들은 못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