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도 시점이었지만 그가 남북관계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강한 추측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서울에 오기 직전인 5월 말에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간의 베이징(北京) 정상회담이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김 위원장의 구상과 중국의 입장을 전달하러 온 장쩌민의 특사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같은 해 3월5일 김 위원장이 예고 없이 평양의 중국대사관을 찾았을 때 그 자리에 황쥐가 있었다는 소문이 베이징 외교가에 나돌기도 했다. 또 남북정상회담 특사였던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3월17일 첫 극비회동을 가진 곳이 바로 상하이였다.
2001년 1월 김 위원장이 중국 개혁 개방의 상징인 상하이 푸둥(浦東)지역을 시찰했을 때 그를 밀착 수행했던 인물도 황쥐였다. 그가 남북관계의 밀사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가 베이징과 평양을 잇는 주요 창구인 것만은 사실이라는 게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상징이 상하이 푸둥이라면, 푸둥의 오늘을 건설한 인물이 바로 황쥐다. 그는 1980년대 중반 푸둥개발영도소조 조장으로서 푸둥의 건설계획을 입안하고 현장을 총지휘했다. 또 90년대 들어 상하이 시장과 시서기를 거치며 인구 1500만명의 상하이를 중국 최고의 도시로 끌어올렸다.
장 주석이 그에게 대북 밀사의 역할을 맡겼다면 북한을 개혁 개방의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그가 가장 적임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다. 그는 이른바 ‘상하이방’의 핵심인물이다.
명문 칭화(淸華)대를 졸업한 그는 상하이 기계공장에서 기술원으로 근무하다 일본에 유학해 선진 경영관리학을 배운 1년 동안을 제외하곤 40여년간을 줄곧 상하이에서만 일해왔다.
장 주석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장 주석이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했을 때 그는 부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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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황쥐는 오래 전부터 중앙 무대로 진출할 것이란 얘기가 많았다. 1999년에는 딩관건(丁關根) 당 선전부장 후임으로 중용될 것이라는 홍콩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장 주석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음에도 그가 상하이에 계속 머물렀던 것은 상하이방에 대한 다른 지역출신들 및 파벌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상하이 시서기를 맡았던 장 주석과 주룽지(朱鎔基) 우방궈(吳邦國)가 연속해서 중앙 정치무대로 옮기자 상하이방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16대를 끝으로 은퇴할 장 주석이 상하이에서 살 집을 직접 물색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황쥐는…▼
△1938년 9월 저장(浙江)성
자산(嘉善)현 출생
△1963년 칭화(淸華)대 전기공정과
졸업
△1966년 중국 공산당 입당
△1963∼67년 상하이(上海)
인조판기기(人造板機器)공장기술원
△1967∼80년 상하이 중화야금공장
기술원, 부공장장
△1980∼81년 일본 수학
(경영관리 연구)
△1982∼83년 상하이시
제1기계전기공업국 부국장
△1983∼85년 상하이시 당 위원회
상무위원, 비서장
△1985∼86년 상하이시 부서기
△1986∼91년 상하이시 부시장,
푸둥(浦東)개발영도소조 조장
△1991∼95년 상하이 시장
△1992년 10월 중앙위원
(제14차 전국대표대회)
△1994년 9월 정치국원
(14기 4중전회), 상하이시서기
겸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