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동지의 당부를 마음속 깊이 새겨 일치단결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업의 새 국면을 열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 세대교체가 이뤄진 15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 모인 중앙위원들 앞에서 장은 후를 이처럼 격려했고, 후는 그의 업적을 계승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박수 소리가 진동했다. 중국 정치사에서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순조로운 권력 이양이었다. 하지만 겉모습이 매끄러웠다고 해서 속까지 그랬다고 믿는 중국인들은 별반 없다. 치열한 내부 권력암투가 있었더라도 이를 봉합하고 지도부간의 단합된 모습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것이 중국 정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내부 갈등이 많았던 권력 개편〓당초 9월 열릴 예정이었던 제16차 전국대표대회(16대)가 두 달이나 늦춰지면서 내부 진통을 예고했다. 홍콩 언론 등에 따르면 장쩌민 주석은 7월 중순 베이다이허(北戴河)회의에서 ‘총서기 유임안’을 제출했으나 주룽지(朱鎔基) 총리와 리루이환(李瑞環)정치협상회의 주석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이들은 ‘70세 정년제’ 준수와 투표에 의한 결정을 요구했다. 상무위원 정년제는 장 주석이 15대 때 정적(政敵)인 차오스(喬石)를 물러나게 하기 위해 도입했던 규정이다.
하지만 장 주석의 퇴진을 결정지은 것은 주 총리가 주도한 부패 사정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주 총리가 장 주석과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측근들에게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고 장 주석과 리 위원장도 주 총리 측근을 부패 혐의로 구속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결국 세 거두(巨頭)간의 치열한 권력암투가 동반 퇴진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권력이양의 제도적 발판 마련〓중국의 권력이양 과정은 전통적으로 인치(人治)적 요소가 강했다. 총서기를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뽑는 법적 절차는 마련돼 있다. 전대 개최 7, 8개월 전부터 각 기관과 성시(省市)별로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이 중앙위원을 뽑으며, 중앙위원들이 정치국원들을 선출한다.
서방 국가와 같은 직접선거는 아니지만 나름의 간접선거 제도를 채용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의 고급간부로 분류되는 중앙위원과 정치국원은 밀실에서 소수 실권자들에 의해 비공개로 결정되는 것이 통례다.
마오쩌둥(毛澤東)과덩샤오핑(鄧小平) 등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거치면서 굳어진 오랜 왕조적 전통과 절대적 권위가 후계자 선택과정에 이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후계자들의 도전도 용납되지 않았고, 실권이 없는 후계자는 도태됐다.
마오 시절의 린뱌오(林彪)나 덩 시절의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은 전자에 속했다. 덩에 의해 실각된 화궈펑(華國鋒)은 후자의 경우였다.
정치국의 인사 변동은 법적으로 중앙위원회의 발의와 비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후계자의 간택과 도태는 실권자의 독단적 결정에 의해 이뤄졌고 정치국 확대회의나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형식적 승인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라지면서 이같은 인치적 요소가 엷어진 것이 사실이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번 당대회는 장 주석이 ‘70세 정년제’를 지킴으로써 권력이양의 제도적 발판을 마련한 것만은 분명하다.
중국의 역대 권력 이양 | |||
회의 | 시기 | 장소 | 내용 |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1년 7월 | 상하이 | 천두슈(陳獨秀) 당중앙국 서기 선출 |
제7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 | 1945년 6월 | 옌안 | 마오쩌둥(毛澤東) 당 주석 선출 |
제9차 전국대표대회 | 1969년 4월 | 베이징 | 린뱌오(林彪) 후계자 규정 |
제10차 전국대표대회 | 1973년 8월 | 베이징 | 린뱌오 쿠데타사건 공표 |
제10기 중앙정치국 회의 | 1976년 10월 | 베이징 | 화궈펑(華國鋒) 당주석 선출(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
제11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 1980년 11월 | 베이징 | 화궈펑 사임 동의 |
제11기 6차 중앙위 전체회의 | 1981년 6월 | 베이징 | 후야오방(胡耀邦) 당주석 선출 |
제12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 | 1982년 9월 | 베이징 | 후야오방 총서기 선출, 당주석제 폐지 |
제12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 1987년 1월 | 베이징 | 후야오방 총서기 사임,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대리 |
제13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 | 1987년 11월 | 베이징 | 자오쯔양 총서기 선출 |
제13기 4차 중앙위 전체회의 | 1989년 6월 | 베이징 | 자오쯔양 총서기 파면,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선출(199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
제16기 1차 중앙위 전체회의 | 2002년 11월 | 베이징 |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선출 |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