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봉사 '한국의 우먼파워'…폭염과 싸우며 돼지치고…

  • 입력 2002년 12월 8일 18시 48분


《외교통상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KA·총재 김석현·koica.or.kr)이 세계의 벽촌에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을 보낸 지 올해로 12년째다. 그동안 1511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오지에서 온몸으로 인류애를 실천해 보였다. 지금도 40개국에서 378명이 활동 중이다. 이들이 흘린 땀은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 행복과 번영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 한국도 당당히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미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는 차라리 부수적인 소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 지난해 파견된 134명 중 91명(68%)이 여성이었고 올해는 139명 중 100명(72%)으로 늘었다. 필리핀과 미얀마의 오지에서 한 해를 넘기는 3명의 젊은 여성 자원봉사자를 만나 얘기를 들어 보았다.》

●“생전처음 총쏴봐”

필리핀 수도 메트로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는 종려나무가 빽빽한 파나이섬이 있다. 이곳 공항에서 차로 1시간가량 달리면 나오는 일로일로주(州) 뉴 루세나에는 서승희씨(25)가 원주민들과 어울려 수익사업 및 지역개발 기획 마련에 1년째 땀을 쏟고 있다. 그는 전북대 대학원에서 지역개발을 전공하다가 이론을 현실에 접목해 보고 싶어서 KOIKA의 자원봉사자 모집 시험에 응시했다.

“지난해 11월 이곳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으로부터 맨 먼저 배운 것이 총기분해와 사격이었다”고 서씨는 말했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필리핀 특유의 치안 불안 때문이다. 마닐라에서 6월에는 한국인 외교관이, 11월에는 한국인 외교관 운전사가 피살됐다.

“생전 처음 총을 쏴봤어요. 이곳 마약인 ‘샤부샤부’에 취해서 가끔 난동을 부리는 사내들 때문이지요. 지금도 제 방엔 권총과 코코넛 벨 때 쓰는 긴 칼 3자루가 있어요. 다행히도 지금까지 써본 적은 없지만요.”

필리핀은 중산층이 없으며 빈부격차가 심하다. 7600만 인구의 30%가량이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지만 15대 가벌(家閥)이 국부의 절반 이상을 쥐고 있다.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를 이루는 8개 도시 중 가장 번화한 마카티 시의 토지 전부를 아얄라 가문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서씨는 “전형적인 빈촌인 뉴 루세나 원주민들과 함께 올 봄부터 장식용 화초인 ‘펌’의 상업적 재배를 비롯해 라이스 케이크와 피넛 버터 제조 등의 수익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여덟 가구에 종자돈을 나눠주고 각각 돼지 한 마리를 사들이게 해 양돈업을 시작했다. 3일에는 마을회관을 완공했다. 서씨는 이를 위해 지난 두 달 동안 주민들과 함께 직접 목재와 벽돌을 져 날랐다.

서씨와 함께 활동 중인 현지 일롱고 개발센터의 필로테오 팔마레스 국장은 “서씨가 워낙 부지런하고 부드러워 주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기자가 서씨와 함께 찾아가자 수십명의 주민이 나와 서씨를 반겼다.

서씨는 이곳 주민들과 빨리 동화하기 위해 손으로 밥을 먹고 현지 언어인 일롱고 말까지 배웠다. “마용아가(안녕)” “살라맛!(고마워)” “부소코(배불러)”쯤은 이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서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현지인들은 그에게 “산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산산’은 원주민 가운데 흔한 이름인 ‘수산’에서 ‘산’자를 따 만들어졌다. “당신의 또 하나의 우리”라는 뜻일 것이라고 서씨는 생각한다.

●농장에 가득한 그린 파파야 향기

서씨가 일하는 뉴 루세나에서 밀림 속 도로를 따라 3시간가량 달리면 아클란주 칼리보가 나온다. 이곳의 광활한 숲 속에 아클란대학 농과대학이 있고, 그 농장에서 문미정씨(25)가 땀 흘리고 있다.

문씨는 충남 천안의 연암축산원예대학을 마치고 장애아동들을 돕다가 지난해 11월 해외 봉사단원으로 파견됐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국제협력단을 해외 인신매매단쯤으로 오해하셔서 설득하는 데 힘들었다”고 말했다.

문씨가 일하는 농장 주변은 치안이 불안하지는 않지만 ‘자연’이 무서울 때가 있다. 밤에는 뻐꾸기 울음소리 같은 도마뱀 울음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린다. 하루 20번 이상 모기에 물리기도 한다. 주민들이 “부코주스(코코넛 물)를 자주 마시면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고 해 따라 했더니 정말 그랬다. 봄에는 방에 뱀이 나타났지만 다행히 물리지는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100여종의 채소와 과일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 “필리핀은 햇볕이 세고 폭우가 잦아요. 작물보다 잡초가 더 빨리 자라고 해충도 많죠. 더위에 지친 현지인들은 농약 치기나 김매기 같은 번다한 일을 싫어해요. 이런 현실에 맞는 작물을 골라주는 게 제 일이죠. 토마토 가지 호박 들깨는 재배에 실패했고, 참외 오이 상추 고추는 성공했죠. 특히 부추는 혼자서도 잘 자라 주민들이 기르기에 딱 좋지요.”

그는 타임, 마조람, 바질, 오레가노와 같은 허브(향초)를 필리핀 현지인에게 소개한 것이 보람이라고 말했다. 이 허브를 처음 본 주민들은 씨앗을 얻어가 상업 재배하기 시작했다.

문씨는 농장에 가득한 파파야 향기를 맡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영화를 보면서 어떤 향인지 궁금했어요. 해가 지고 나면 온 농장에 퍼지는 파파야 향기는 그윽하고 달콤한 것이지요. 마치 순박한 필리핀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봉사단원이 상류층이 되다니”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미얀마(옛 버마)에 도착하면 특이한 지폐들을 볼 수 있다. 45차트(화폐 단위)와 90차트짜리다. 군부 출신으로 5일 숨진 네원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숫자 ‘9’를 좋아해서 일부 화폐 단위를 9의 배수로 하도록 한 데 따른 것이다. 미얀마의 군부 통치가 남긴 유산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 300달러선인 이 나라 미얀마(옛 버마)에서 공무원인 의사들의 월급은 고작 10달러(약 1만차트) 수준이다. 의사들은 밤에 개인병원에 나가 돈을 번다.

미얀마의 수도 양곤 외곽의 밍갈라동 난초연구소에서는 강성숙씨(32)가 일하고 있다. 그는 “KOIKA에서 매월 기초생활자금으로 봉사단원들에게 330달러를 보내주는데 여기선 고액 연봉자들이나 받는 돈”이라며 “가난한 나라에 봉사하러 온 사람이 본의 아니게 상류층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이 되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전 8시면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출근해 꼬박 8시간 이상 난초 재배와 연구원들의 연구기반 조성에 힘을 쏟는다. KOIKA로부터 3500달러를 지원받아 미얀마인들에게 상업용 난초 재배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관을 건설 중이다. 인근의 묘판 집결지에 스프링클러와 물탱크 시설도 갖춰주었다.

‘여성신문’ 기자였던 그는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는 남성들이 부처에 한 단계 더 다가선 것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여성들은 성소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들은 ‘론지’라 불리는 치마를 입는데, 론지가 걸린 빨랫줄에는 여자 빨래는 걸 수도 없다.강씨는 “사람들이 성은 쓰지 않고 이름만 사용하는 것도 미얀마만의 특색”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성끼리 근친결혼을 하기도 쉽다고 한다. 이름에는 태어난 요일을 넣는 관행이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재야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의 경우 ‘수’는 화요일에 태어난 것을 뜻한다. 강씨는 “미얀마는 19∼21세기 문화가 공존하는 국가”라며 “가난하지만 한국을 모델로 경제 성장을 이뤄보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로일로시티·칼리보·양곤〓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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