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선을 보고/美 전문가 대담]한국인 역동성 새삼 확인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8시 50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대통령선거 승리가 미국에서 미묘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미 행정부는 노 당선자와의 협력을 다짐했지만 언론 등에선 한미 관계가 수월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대북정책을 놓고 한국과 이견을 빚어온 미국은 이번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본보는 19일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KEI) 회의실에서 한반도 전문가인 윌리엄 드레넌 미 평화연구소(USIP) 연구학술 담당 부실장과 로버트 듀자릭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대담으로 이 같은 의문을 풀어보았다. 사회는 본보 해외 칼럼니스트인 피터 벡 KEI실장이 맡았다.

-많은 놀라움을 준 한국 대선에 대한 관전평을 한다면….

▽드레넌〓대단한 선거로 역동하는 민주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후보들이 치열한 선거전을 평화적으로 치른 것이 인상적이다. 선거 막판에 국민통합21의 정몽준(鄭夢準) 대표가 노 당선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과 이것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 등은 놀랍다. 투표율이 비교적 낮은 것은 다소 이상했다.

▽듀자릭〓투표율이 낮은 것은 한국 사회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갈라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차이가 그리 크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가 당선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후보들간의 상호비방과 중상 등 네거티브 캠페인이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오는 것을 막았을 수도 있다.

-노 당선자의 승리는 한국 대선에서 ‘반미’가 ‘북풍’보다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나. 선거직전에 터진 미사일 적재 북한 선박의 나포와 북한의 핵시설 재가동 선언 등이 예상과는 달리 큰 변수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듀자릭〓이제 많은 한국인들은 더 이상 북한을 위협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이는 큰 변화이다. 반면 대북 강경책을 추진하는 부시 대통령의 인상은 좋지 않다. 미국의 동맹국 선거에서 반미가 이슈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9월 독일총선에서도 미국, 특히 부시 대통령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재집권에 크게 작용했다.

▽드레넌〓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본 것은 한국정치의 미래다. 나는 후보들이 외세와 무관한 애국자임을 주장하는 현상은 한반도 통일 후에나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후보조차 다급해지니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 등과 관련, 미국에 등을 돌리려 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한미관계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한국의 반미는 양국의 오랜 안보 동맹에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 역사는 이번 선거를 한미관계의 전환점으로 기록할 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려는 것에 관해선….

▽드레넌〓미국은 공식적으론 한미 관계가 대등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과 대등한 국가는 없다. 한국인들의 대미관은 이중적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싫어하면서도 자녀들을 유학보내고, 국난시 이민갈 국가로 미국을 가장 먼저 생각하지 않는가.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 양국이 취해야 할 조치는….

▽듀자릭〓한국측에선 문제는 북한 핵 등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저해하는 것도 북한의 행동이다.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처럼 문제가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하고, 한국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이해해야 한다.

-월가의 한 분석가는 한국 대선 며칠 전 블룸버그 통신에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 눈길을 끌었는데….

▽듀자릭〓월가는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이른바 박정희식 모델과 이의 원조 격인 일본식 모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박정희 모델은 ‘수출은 선, 수입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외국인들의 한국증시 투자 등을 제약해 왔다. 이 후보는 친재벌적이어서 이 같은 박정희 모델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돼 왔다. 월가는 따라서 외국인 투자환경 등의 면에선 노 당선자가 이 후보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여중생 치사사건으로 한국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SOFA 개정에 관한 의견은….

▽드레넌〓한국에선 노 당선자의 승리로 SOFA 개정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하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미국은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주한미군으로부터 박탈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의 어느 정권도 한국과의 SOFA를 개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키르기스스탄과 체결한 SOFA도 한미간의 SOFA와 유사하지 않은가.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물러나기를 기다려 왔다. 노 당선자에겐 어떻게 대응할까.

▽드레넌〓부시 행정부가 이번에 이 후보 당선을 바랐던 것은 알려진 비밀이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2000년 미 대선 때 민주당 앨 고어 후보가 부시 후보에게 승리,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계승되기를 기대했었다. 부시 행정부는 공식적으론 한국 대선 결과를 환영하지만 실제론 현 상황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최소한 단기간은 부시 행정부도 패자의 하나다.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 등 중요 현안에 관해 근본적인 견해차가 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다.

▽듀자릭〓노 당선자와 부시 대통령은 앞으로 열릴 정상회담에 앞서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지난해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 서둘러 3월에 워싱턴을 방문했던 김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실패였다. 노 당선자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