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공서열과 평생고용을 축으로 하는 일본식 고용시스템은 장기 불황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가. 올해 일본의 춘투(春鬪·노조의 임금인상 투쟁)가 12일 시작된 가운데 대기업들이 근무 연수에 따라 봉급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정기승급제를 없앨 움직임을 보여 관심을 끌고 있다. 정기승급제의 폐지는 전후 50년 이상 지속돼 온 연공서열식 급여체계의 골간을 전면 수정하는 것으로 실적에 따른 임금의 차등지급→연봉제 확산→평생고용의 폐기로 이어질 민감한 사안. 지난해 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을 중심으로 잇따라 정기승급제 폐지를 발표하고 있지만 노조의 반발이 거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일본 샐러리맨들의 혹독한 겨울나기=일본의 노조연합체인 ‘렌고(連合)’는 경기침체를 감안해 고용안정을 올해 협상의 목표로 정하고 임금인상 요구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 하지만 기업들이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정기승급제까지 없애려고 하면서 노사간에 신경전이 치열하다.
미쓰비시자동차는 13일 일반사원(비관리직)에 대한 정기승급제도를 4월부터 폐지키로 했다. 노사 양측은 연령이나 자격등급에 따라 매년 인상되는 정기승급분을 없애는 대신 개인별 업적에 따라 성과급을 주는 제도를 도입키로 원칙 합의했다.
잠정 결산 결과 지난해 적자를 낸 후지쓰도 정기승급분의 자동인상 폭을 낮추기로 결정했다. 캐논 혼다 히타치 NEC 등도 정기승급을 아예 없애거나 성과급의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임금체계를 손질하고 있다. 일본 기업 중에는 지난해 1조5000억엔의 경상이익이 예상되는 도요타자동차노조 정도가 일시급 형태의 성과급을 요구 중이다.
일본 기업의 평균 임금은 2000년 이후 1% 미만의 플러스 인상률(전 산업 평균)을 가까스로 지속해오다 지난해 사상 처음 인상률이 0%에 머물렀다. 노조측은 정기승급에 따른 자동 인상분이 1.89%에 달해 임금 동결분을 약간이나마 상쇄했는데 이마저 없애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성과 중시 ‘신(新)일본형 임금체계’ 가능할까=사측은 현재 일본의 임금이 외국에 비해 너무 높아 국제경쟁력 약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며 정기승급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요타자동차 회장인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일본 경단련 회장은 “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는데 직원들의 임금만 오르는 것은 비정상”이라며 “임금 부문의 거품이 빠져야 장기적으로 고용도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노조측은 “정기승급분은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대가로 보장받아 온 일본 샐러리맨의 자존심”이라며 “정기승급분의 폐지는 일할 의욕을 떨어뜨려 기업 경영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기승급분을 둘러싼 올해 노사협상의 추이가 앞으로 일본식 새 임금제 도입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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