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빼든 美 “고민되네…”

  • 입력 2003년 2월 16일 18시 22분


초읽기에 들어가는 듯했던 이라크 사태의 무력 해법이 멈칫거리고 있다. 유엔 무기사찰단이 14일 ‘대량살상무기(WMD)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발표한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내에서 신중론이 힘을 얻었기 때문. 최대 규모의 반전(反戰)시위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가세하는 가운데 속공 분위기를 주도해 온 미국의 입지는 적잖이 위축되는 양상이다.

▽힘 실리는 추가 사찰론=한스 블릭스 무기사찰단장의 2차 보고는 1차 때처럼 애매한 내용을 담아 안보리 이사국들이 각각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할 구실을 줬다. 그러나 블릭스 단장은 “이라크가 사찰에 미리 대비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언급해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5일 제기한 ‘사전에 WMD를 은폐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등 1차 때보다 순화된 표현을 썼다는 평가.

그의 보고 직후 프랑스의 도미니크 드 빌팽 외무장관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다음달 14일 안보리 회의를 열어 다시 이라크 상황을 평가하자고 제안했다.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즉각 동조했고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과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도 “사찰에 더 많은 시간을 줘야 한다”고 거들었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아예 “사찰을 끝내려면 6개월이 더 필요하다”며 기간 연장과 인력 증원 등을 희망하기도 했다.

▽한 발 물러선 미국과 영국=파월 장관은 사찰 보고 직후 “유엔이 반대해도 대통령과 함께 ‘몇주 내’ 전쟁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차 보고를 도화선 삼아 이라크 공격을 행동에 옮기는 내용의 결의안을 준비했던 미국과 영국은 ‘전술적으로’ 우회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상황에 몰린 것으로 보인다. 강경한 결의안이 통과되기 어려운 데다 국제 여론도 두 나라 입장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있다.

외신은 유엔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두 나라가 다음주 중 2차 결의안 초안을 내놓으면서 ‘명시적인 전쟁 요구를 삭제하는’ 쪽으로 내용을 순화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15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2월28일 기한’이란 조건을 붙여 사찰 기간 연장을 수용했다.

▽미국의 선택은 그래도 전쟁=앞으로 미국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 유엔 안보리를 구슬려 이라크 공격의 구실을 찾아내든지, 아니면 독자 공격하는 방안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전쟁은 막기 어려우리라는 것이 외교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6일 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곧 이라크 위기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포기할 것”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AFP통신은 외교소식통들을 인용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통과했다”며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스스로 이라크를 떠나지 않는 한 전 세계적인 반전 시위나 세계 각국의 어떠한 비난도 전쟁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5일 “미국이 2차 결의안에서 무력사용 승인 조항을 빼려는 것은 ‘유엔이 전쟁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분석 보도가 맞는다면 미국 영국은 유엔의 (2차)결의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독단적으로 군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절충형’ 해법을 택하려는 셈이다. 이미 17만 병력을 중동에 이동 배치한 미국이 ‘뺀 칼을 칼집에 도로 넣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도 이 해법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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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 美 외교고립 경고▼

미국이 이라크와 북한 핵 문제 양쪽에서 모두 외교적으로 곤경에 빠져 있으며 그 이유는 미국 자신에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16일 보도했다. 포스트는 미국은 지난 2년 동안 국제 여론을 무시하고 고압적이고 으름장을 놓는 전술을 구사해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의 반감을 샀다고 보도했다.

1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대표가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을 늦춰야 한다고 말하자 엄숙함을 유지하는 안보리 회의의 오랜 관행이 깨지면서 갈채가 터져나온 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미국과 입장이 같은 국가의 한 외교관은 “미국 외교팀은 마치 무뢰한처럼 굴었으며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며 “이라크 군사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미온적인 것도 이 같은 태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고압적인 사례로 교토의정서와 국제형사재판소 가입 거부, 한국의 ‘햇볕정책’에 대한 돌연한 거부, 탄도미사일금지협정의 탈퇴, 선제 공격 독트린 주창 등을 들었다. 유럽의 한 고위 외교관은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세게 밀어붙이면 모두 굴복할 것으로 믿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는 오히려 미국의 고립. 지금 상황에서 이라크를 친다면 영국 이외에 동참할 주요 국가는 없는 상태다.

뉴욕 타임스는 15일 이라크전 전비와 재건 비용이 1270억달러에서 많게는 6820억달러가 소요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가 2003, 2004년 예산에서 각각 계상한 재정적자만 해도 3040억달러와 3070억달러에 이르러 여기에 이라크전 비용을 더하면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칠 것인가, 아니면 국제적 지지를 구하면서 경제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고 있는 불확실성을 더 연장시킬 것인가. 부시 행정부는 점점 더 수렁에 빠지고 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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