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발레유학 열풍…러 볼쇼이 학교를 가다

  • 입력 2003년 2월 23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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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익사노프 볼쇼이극장장(오른쪽)과 김기현 특파원.
아나톨리 익사노프 볼쇼이극장장(오른쪽)과 김기현 특파원.
《발레 열풍이 불고 있다. 발레 학원을 찾는 꼬마들의 줄이 이어지고 웬만한 발레 공연마다 객석이 가득 찬다.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무용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러시아로 발레 유학을 가는 중고교생들이 늘고 있다. 한국에선 러시아의 고전 발레가 인기다.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인형’, ‘지젤’ 등은 영원한 인기 레퍼토리다. 구소련 붕괴 후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러시아 발레, 그 정수는 무엇일까. 세계적인 볼쇼이 극장과 볼쇼이 발레학교를 찾았다.》

모스크바 중심가의 ‘테아트랄나야 플로슈디(극장 광장)’. 발레와 오페라 극장인 볼쇼이 극장(대극장이라는 뜻)과 연극 전용극장인 말리 극장(소극장)이 나란히 자리한 러시아 공연예술의 중심지다.

구소련 붕괴 후 국가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볼쇼이 극장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동향인 아나톨리 익사노프 극장장이 취임하면서 강도 높은 개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지난해에는 950석 규모의 제2극장을 새로 지었다.

기자를 맞이한 익사노프 극장장의 방은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책상이나 소파 등 집기들이 모두 223년의 극장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골동품이었다.

볼쇼이 발레학교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볼쇼이 극장은 발레단과 오페라단, 오케스트라를 모두 갖추고 있고 직원만 3000여명에 이른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세계 정상의 발레단이다.

안팎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볼쇼이 발레가 세계 정상을 지켜온 비결을 묻자 익사노프 극장장은 완벽한 ‘레퍼토리 시스템’과 ‘전통’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발레단과 달리 볼쇼이는 언제든지 공연할 수 있는 수십개의 레퍼토리를 갖고 번갈아 가며 매일 밤 다른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 또 볼쇼이 발레는 개·보수 기간에도 공연을 중단한 적이 없다.

볼쇼이 발레의 전통은 부설 발레학교를 통해 유지된다.

모스크바 남부 프룬제 거리에 있는 볼쇼이 발레학교. 볼쇼이 발레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옛 키로프) 발레가 러시아 발레의 쌍벽을 이루듯 볼쇼이 학교는 마린스키 극장 부설 학교인 바가노바 발레학교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바가노바 출신이 볼쇼이에 입단하거나, 볼쇼이 출신이 마린스키에 입단하는 경우는 드물다.

볼쇼이와 바가노바는 한국발레를 이끄는 유망주들도 많이 배출했다. 국립발레단의 김주원씨는 볼쇼이에서 유학했고 김지영씨(네덜란드 국립발레단)는 바가노바 출신이다. 배주윤씨(볼쇼이)와 유지연씨(바가노바)는 졸업 후 러시아에 남아 각기 볼쇼이와 마린스키에서 활약하고 있다.

볼쇼이 학교의 과정은 모두 8년.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인 10세에 입학한다. 해마다 40명가량을 뽑는데 경쟁률은 평균 200 대 1. 오디션과 신체검사, 의료검진을 거치며 당장의 기량보다는 신체조건과 가능성에 더 비중을 둔다. 외국인 학생들은 별도로 오디션을 보는데 반드시 1학년에 입학하지 않고도 도중에 편입이 가능하다.

이곳에 입학하면서 평생을 발레와 함께하는 삶이 시작된다. 러시아 학생의 경우 학비는 전액 국가에서 부담한다. 수학 역사 등 일반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도 있지만 대부분의 수업은 훌륭한 무용수를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엄격하고 힘든 훈련이 이어지며 입학생 중 4분의 1 정도는 중도 탈락한다.

취재중 만난 주희진(15·왼쪽), 이민나양(18). 볼쇼이 발레학교에는 9명의 한국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볼쇼이단원 중 95%는 볼쇼이 학교 출신. 그러나 볼쇼이 학교를 졸업한다고 모두 볼쇼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창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지난해의 경우 44명의 졸업생 중 16명만이 볼쇼이에 입단했고 나머지는 다른 극장으로 가야 했다.

전문 무용수가 되지 않을 졸업생은 5년 과정의 대학과정에 입학해 안무가나 교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현재 외국 유학생은 47명. 일본과 한국(9명) 학생이 가장 많다. 학교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 이민나(18), 주희진양(15)은 “충실한 기본기를 배울 수 있다”며 만족해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홀로 유학을 와 기숙사와 교실, 연습실만을 오가는 생활이 쉽지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은 선진국에 비해 불편한 러시아의 생활여건과 길고 추운 겨울이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학비는 연간 1만5000달러로 서방 국가에 비해 싼 편이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레오노바 교장 인터뷰 "본격 발레수업 8,9세 적당"▼

“먼저 아이들이 발레와 예술을 사랑하게 만드세요.”

마리나 레오노바 볼쇼이 발레학교 교장(52·사진)은 자녀들에게 발레를 가르쳐 전문 무용수로 키우려는 꿈을 가진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레오노바 교장은 “그동안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 부모들의 열성적인 교육열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는 볼쇼이 극장에서 20년 동안 발레리나로 활약해 구소련 정부로부터 공훈예술가 칭호까지 받았다. 딸도 볼쇼이 발레단의 발레리나다.

―발레는 조기 교육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몇 살 때 발레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

“너무 어릴 때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 본격적인 발레는 8, 9세에 시작하는 게 좋다. 그 전에는 예비학교에서 체조 정도를 배운다.”

―한국 발레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러시아 발레는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클래식의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한국이나 일본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라서 러시아 발레와 친숙한 것이다. 한국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는 여전히 우리 볼쇼이의 간판 작품인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인형’, ‘지젤’이다. 한국 발레는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데 부드럽고 유연한 것이 특징이다.”

―볼쇼이 발레학교와 바가노바를 비교하면….

“볼쇼이나 바가노바 모두 러시아식 고전 발레를 지향하고 있어 교수법이나 발레 스타일은 같다. 다만 마린스키 발레가 더 섬세하고 고전에 충실한 것처럼 바가노바는 우리보다 학풍이 보수적이랄까…. 바가노바는 편입이 어려워 외국인 학생이 적다.”

―가장 유명한 두 학교 외에도 러시아에 다른 명문 발레학교가 있는가.

“모스크바에는 레다흐 발레학교와 네스테로바 발레학교가 있고 페름, 노보시비리스크, 크라스노야르크스, 카잔 등의 지방에도 훌륭한 발레학교가 많다.”

▼볼쇼이 단원 배주윤씨 "러시아, 발레교육 기본기 중시해"▼

무용수라면 누구나 한번은 밟아보기를 꿈꾸는 볼쇼이 무대. 이곳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212명의 볼쇼이 발레단원 중 구소련권 국가 출신을 제외한 순수 외국인은 단 두 명뿐이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한국인 발레리나 배주윤씨(25·사진)다.

15세 때 러시아로 홀로 유학을 가 볼쇼이 발레학교를 마치고 1996년 볼쇼이 식구가 된 그는 1997년 모스크바 국제콩쿠르에서 특별상과 관객이 뽑은 인기상을 받는 등 발레 본고장에서 기량을 인정받고 있다.

―볼쇼이단원의 생활은 어떤지.

“오전 10시쯤 몸을 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3∼6시간씩 연습한다. 보통 공연이 끝나 집에 오면 밤 12시. 체력 소모도 많고 항상 잠이 모자라 시간만 나면 눈을 붙여야 한다. 공연은 역할에 따라 다르지만 단원 수가 많고 경쟁이 심해 한 달에 3, 4번밖에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단원들이 해외나 지방으로 외부 공연을 다니며 기량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도 보충을 한다.”

―졸업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볼쇼이에 남게 된 계기는….

“볼쇼이에 계신 마리나 콘드라체바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싶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학을 결심했다. 연수단원으로 있다가 1999년 정식 입단한 후에는 귀국하기가 아쉬워서 모든 것을 접고 남기로 했다.”

―러시아 발레 교육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체계적인 교육과 발레의 전통 그리고 예술을 존중하는 전반적인 문화 풍토가 러시아 발레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테크닉보다는 기본기를 중시한다. 또 ‘무엇보다도 발레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을 늘 생각한다.”

―러시아로 유학을 가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외롭고 힘들었던 일이 많지만 특히 동양인으로서 신체적 차이를 느낄 때가 가장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의지와 발레에 대한 애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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