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戰爭]"바그다드로" 地上軍 거침없는 진격

  • 입력 2003년 3월 21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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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연합군이 당초 계획을 하루 앞당겨 지상군을 이라크에 진격시켰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제거’를 위한 바그다드 공습이 전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지상군 투입시기도 당겨진 것.

▽지상군 진격=지상군의 이라크 진격은 전폭기와 포병의 강력한 화력지원 속에 전개됐다. 이라크 남쪽 국경도시인 샤프완 인근 구릉에 세워진 군 관측소 등이 첫째 타격목표. 전폭기가 11발의 합동정밀직격탄(JDAM)을 투하했고 이어 미군 155㎜ 자주포가 살상 반경 50m 이상의 포탄을 100발 넘게 쏟아냈다.

미 제1해병대와 3보병사단, 영국 해병특공대가 한꺼번에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선 것은 20일 오후 8시경(한국시간 21일 오전 2시). 이라크군의 방어벽이 다소 취약할 것으로 예상된 북쪽 전선은 보병사단이, 유정과 원유 파이프라인이 깔린 동쪽 전선은 기동성이 뛰어난 해병대가 투입됐다.

해병대 전방 정찰대는 미 7기갑여단 소속 장갑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북동진한 끝에 오후 9시48분 모래폭풍 속에서 이라크 정규군과 처음으로 맞닥뜨렸다. 격전 끝에 이라크의 T-55 탱크를 파괴하고 6명의 이라크군을 사살했다.

▽치열했던 움카스르 공방전=지상군이 이라크군과 접전을 벌이는 동안 바그다드에 대한 4차 공습이 오전 3시 단행됐다. 후세인 대통령의 집무실인 대통령궁과 타리크 아지즈 부통령의 집무실인 기획부 청사, 후세인 장남인 우다이의 자택이 타격목표. 기획부 청사는 금세 화염에 싸여 무너졌다.

순탄하던 미영 연합군의 진군은 국경도시 움카스르에서 막혔다. 전략요충을 지키려는 이라크군은 휴대용 미사일과 기관총으로 2시간이나 저항했다. 그러나 영국 포병의 집중포격으로 진지가 무너졌고 잠시 뒤 30여명의 이라크군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결국 이라크국기 대신 성조기가 내걸렸다. 원유수출 터미널 입구에 걸려 있던 후세인의 대형 초상화는 병사들이 기념품으로 뜯어냈다.

▽유정터미널 장악=쿠웨이트 접경 이라크 유정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은 데 이어 남부 최대의 유전지대인 바스라 일대의 유정에서도 폭음이 들린다는 정찰대의 첩보가 카타르의 통합사령부에 울렸다.

제임스 콘웨이 미 해병대사령관(중장)은 즉시 미 해군 침투전문 특수부대(SEAL)와 영국군 해병 최정예요원을 직접 알파우 반도에 자리잡은 2개의 원유 수출 터미널(카봇, 마봇) 상공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 원유터미널을 뒤늦게 탈환하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기름이 바다로 흘러들어 재앙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다행히 특수요원들은 두 곳을 곧바로 장악, 파이프라인의 밸브를 막고 15명의 이라크인을 포로로 붙잡았다.

▽전선 확대=21일 오전 1시30분. 바그다드 북쪽 키르쿠크와 모술시에도 대규모 공습이 가해졌다. 이라크 북부 자호와 서부 사막지대에도 미군이 투입됐다고 외신은 타전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이라크 전역으로 확대됐다.

오전 3시37분 이라크 남동부 알파우 반도에 공중 투하된 영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해병대원 12명을 태운 미 해병대 CH-46시나이트헬기가 이륙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명성을 날린 노후한 이 헬기는 유정에서 타오른 연기와 모래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곧 추락, 영국군 8명과 미군 4명이 전원 사망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이라크 자유’ 작전에 참가한 미영 연합군의 첫 인명 피해는 이렇게 기록됐다. 이날 오후에는 바스라 부근에서 미국 해병대원 1명이 교전으로 첫 사망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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