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측은 일단 인권위의 반전 의견을 ‘다양한 의사표현’ 수준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국가기관인 인권위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추진해온 이라크 파병에 정면 배치되는 의견을 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전망이다.
▽의견 표명 경위〓인권위 내에서 반전 의견이 공식화된 것은 24일. 유시춘 상임위원(소설가)이 정기 전원위원회에서 “이라크전쟁과 관련해 인권위의 명확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이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세계인권위원회’가 25일 이라크전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놓으면서 인권위의 반전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먼저 인권위 직원 30여명이 25일 전쟁과 파병반대 서명에 들어갔으며 인권위도 같은 날 5차례에 걸쳐 간부회의를 열어 논의를 거듭한 뒤 26일 오전 최고의결기구인 전원위원회를 열어 의견서를 채택했다.
26일 열린 긴급 전원위원회에는 정원 9명 가운데 7명이 참석, 5명이 반전 의견 표명을 지지했고 2명이 이를 반대했다. 김창국(金昌國) 위원장은 외부에서 전화로 반전 의견 표명 지지 의사를 밝혔다.
참석자들은 “1시간여 동안 난상토론을 벌였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공식의견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정부가 추진 중인 파병에 대해서는 ‘반대’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의견서는 ‘이라크와 관련된 사안을 반전 평화 인권의 대원칙에 입각해 접근할 것’이라며 완곡하게 표현, 정부와 충돌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타당성 논란〓반전의견서 채택을 주도한 유시춘 위원은 “많은 고민을 했지만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평화유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헌법5조를 생각해 의견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현 상임위원(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국가인권위법 4조에 따르면 ‘이 법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영역 안에 있는 외국인에 한해 적용한다’는 문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라크전은) 한마디로 인권위가 개입할 부분이 아니며, 정부가 ‘국익’을 이유로 참전 의사를 밝힌 마당에 정부기관인 인권위가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그는 덧붙였다.
▽각계 전문가 의견〓인권위가 국외(미국과 이라크)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을 두고 외부 논란도 잇따르고 있다.
이화여대 김석준(金錫俊·행정학) 교수는 “인권위는 정부기구라는 ‘법률적인 해석’과 외부 영입인사가 많은 독립적인 기구라는 ‘희망적인 해석’의 차이가 병존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 경우 법률적인 해석이 우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대통령과 정부의 파병안에 대해 국가기구인 인권위원회가 반대하고 나서는 ‘정부 내에서의 의견 불일치(Institutional Pluralism)’는 통치에 대한 도전”이라며 “이 같은 혼선은 국가 기강마저 혼란스럽게 만들 소지가 크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김우상(金宇祥·정치외교학) 교수는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필요하지만 이미 대통령이 국익을 고려해 국회에 파병안을 상정해 놓은 상태에서 국가기구가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반면 참여연대의 이태호 정책실장은 “파병 반대에 대한 여론 수렴 없이 파병안을 처리하려는 국가에 대해 인권을 대변하는 기구가 제동을 건 것은 환영한다”며 “인권위의 의견으로 인해 정부는 선택의 여지를 넓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국가인권위는 어떤 기구▼
2001년 11월 25일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직제표 상으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기관’이다. 그러나 인원과 조직은 행정자치부와의 협의를 거쳐 정하고, 예산결정과 처리는 기획예산처의 심의를 받으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정부기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에 대해 인권위측은 업무를 독립적으로 하기 때문에 통상적 ‘정부기관’과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기관은 아니지만 특별검사처럼 입법 행정 사법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도의 독립기관’이라는 입장.
유시춘 상임위원은 이에 대해 “인권위는 어떤 의미에서 국가공권력도 인권침해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항상 ‘같은 의견’을 낼 수는 없는 모순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서 상임위원은 “정부와 인권위는 서로 견제하고 비판적 협력을 하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인권위에는 현재 172명의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 중 단 1명만 행자부 파견 공무원이고 나머지는 모두 자체 공무원이다. 이 중 60%는 일반직, 40%는 별정직 공무원.
최고의사기구인 전원위원회는 11명이 정원. 현재는 9명이 활동 중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각각 4명, 대법원장이 3명을 임명한다.
인권위의 지위와 기능에 대한 논란은 계속돼 왔다. 인권위는 지난해 10월 서울지검 피의자 폭행사망사건을 직권조사했고, 지난해 8월 주한미군에 임의로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해 정부측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또 인권위 김창국(金昌國)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9일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PF) 출장을 다녀온 뒤 청와대로부터 “장관급 이상이 해외출장을 갈 경우 대통령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김 위원장은 이를 어겼다”며 엄중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김 위원장측은 “인권위원장은 대통령의 출장허가 대상이 아니다”며 반발했다.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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