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도 알 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생사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해 계속 테러악몽에 시달리는 등 ‘절반의 승리’에 머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아직 후세인 대통령의 행방은 물론 생사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태. 최근 사망설과 생존설, 지하터널 은신설, 북부 도시 모술로의 피신설이 나온 데 이어 인근 중동국가인 시리아로의 망명설, 러시아 망명설, 그리고 바그다드 주재 러시아대사관 내 피신설까지 무성한 추측만 나돌고 있다.
이와 관련, 나비 베리 레바논 국회의장은 “후세인 대통령이 바그다드 내 러시아대사관에 피신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러시아 모두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한편 아랍어 위성방송 알 자지라 인터넷판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이라크가 저항을 하지 않는 대가로 후세인 대통령 일가와 이라크 지도부를 위한 도피처를 물색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알 자지라는 러시아군 정보부 고위장성의 말을 인용해 이런 협상 때문에 공화국수비대를 포함한 이라크군이 거의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설령 후세인 대통령이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통제력을 거의 상실해 24년에 걸친 그의 철권독재는 사실상 마감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 대통령은 ‘대결하는 자’ ‘충돌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사담)에 걸맞게 일생동안 끊임없이 안팎으로 대결해 왔다.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세 때 급진 민족주의 계열이자 사회주의적 성격의 바트당에 입당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68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혁명지도평의회 부의장 등 요직을 거쳐 1979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인권을 탄압하는 공포정치를 펼쳐 집권 바트당과 혁명평의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적이 많았던 그는 늘 신변에 위협을 느껴 10개에 이르는 대통령궁을 옮아가며 거주하고 같은 잠자리에서 이틀 이상 머물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그는 1986년 전략회의 도중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부하를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한 뒤 현장에서 즉결 처형하기도 했다. 또 1989년에는 자신의 친척인 국방장관과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헬기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공중 폭파시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처형했으며 친인척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9년에는 우방국의 요청과 적대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기자를 스파이 혐의로 사형에 처해 국제적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 자신의 대형 동상을 세우고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는 등 우상화 작업에도 열중했다.
호전적인 성격의 그는 아랍의 맹주를 꿈꾸며 주변국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권좌에 오른 지 1년 만인 1980년 이란과 전쟁을 일으켜 8년간이나 끌었으며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후 후세인 대통령은 걸프전을 치르며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해 30여개국과 대결해 왔다.
그러나 자신과 이라크 국민의 목숨을 건 도박을 벌였던 후세인 대통령은 결국 바그다드 함락과 함께 풍전등화의 신세로 전락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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