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전후 이라크 복구사업에 매우 중대한(vital) 역할을 할 것이다.”(8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회담 후)
“유엔은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앞으로 훨씬 적극적인(positive)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유엔은 결정권을 가진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 유엔이 책임을 맡을 수는 없다.”(10일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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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역할과 위상에 관한 이런 말들은 유엔과 미국의 역학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유엔은 전쟁 뒤 이라크와 관련된 자신의 역할을 미국에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번 전쟁을 주도한 미국은 아랍권이나 세계 각국의 반감을 감안해 유엔을 ‘커버(cover)’로 활용하려할 뿐 핵심 역할은 맡기지 않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고 있다.
유엔이 바라는 것은 아프가니스탄 방식. 인도적 지원은 물론 전후의 치안유지 및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코소보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도 있다고 주장한다. 복구사업이 미국 주도로 추진될 경우 소외될 처지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은 당연히 유엔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큰 이권이 걸려있는 이라크 복구 사업은 미국과 영국 주도로 하겠다는 의도다. 다만 인도적 지원 사업은 각국의 참여가 필요한데다 이라크 새 정부에 대한 유엔의 승인 문제가 있으므로 유엔에 일정한 역할을 맡기겠다는 방안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엔으로서는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전쟁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이제 전후처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이 보장되지 않는 등 위상에 큰 상처를 안게 됐다. 사실 이런 상황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세계의 분쟁을 둘러싸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합의에 이르지 않을 때마다 유엔의 역할은 위축되고 위기에 빠지기 일쑤였다.
유엔주재 선준영 대사는 “이번 전쟁의 와중에 유엔의 권위가 약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면서도 “정치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유엔은 본래 그런 곳이며 유엔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고 말했다. 유엔이 강대국 위주로 운영되지 않도록 상임이사국 수를 늘리는 등 안보리 개혁안이 10년째 논의되고 있지만 이번에도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선 대사는 덧붙였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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