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윌리엄 스튜어트 미국 공중위생국장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가 1980년대 에이즈의 창궐과 21세기에 들이닥친 광우병, 사스 등을 보았다면 얼마나 당황했을까.
생명 복제가 가능할 만큼 과학적 진보를 이뤄낸 인류에게 전염병의 부재는 당연한 권리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전염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사스가 증명해 보였다.
전염병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인류의 역사는 전염병의 역사였다. 인류사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다시 쓰여지고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쓴 세계사
1만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일궈낸 농업 혁명은 역사의 진보이자 재앙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떠돌이 유목민 생활을 끝내고 강가에 정착해 밀집된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닭 돼지 소 말 등 수백 종의 기생생물을 지닌 가축을 길렀고 주변에는 쓰레기와 오물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쌓아두었다. 고기 대신 곡물 위주의 식생활로 영양은 결핍된 상태였다. 더럽고 밀집된 환경에 모여 있는 면역성 떨어진 사람들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라는 불씨만 있으면 언제든 불길로 번질 수 있는 연료였던 셈이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몰락시킨 것은 스파르타가 아니라 홍역이었다. 스파르타의 침공으로 수많은 촌락민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고 덥고 숨막히는 오두막에서 비비적대던 아테네인들 사이에 역병이 돌아 5년간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줄었다.
신대륙 탐험과 대륙간 전쟁이 아니었다면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도 없었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마젤란의 세계 일주는 ‘신세계’ 원주민에게 무서운 전염병을 옮겼다. 유럽인들에게는 면역이 생긴 질병도 이들 원주민에게는 무서운 역병이 됐다. 그 피해 규모는 정복자들이 “신이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땅을 청소해주셨다”고 할 정도였다.
발진티푸스는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발진티푸스는 공산주의 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러시아에도 번져 레닌은 “사회주의가 발진티푸스를 물리치거나 발진티푸스가 사회주의를 좌절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고 선언했다.
산업혁명이 진행됐던 18세기말 새로운 기술 시대의 도래를 알린 것은 콜레라였다. 공장이 있는 도시로 농촌 인구가 꾸준히 유입됐고 공장과 빈민가에는 대규모의 쓰레기 더미가 쌓이기 시작했다. 공기와 물은 오염됐고 철도와 배를 통해 질병은 대륙을 옮겨다녔다.
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의 인플루엔자가 세계를 강타했다. 당시 사망자 수는 2000만명으로 추산됐는데 이는 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수인 1500만명보다 많은 것이다.
1880년대 ‘세균 사냥꾼’으로 불리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등장으로 인류의 전염병과의 싸움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들은 특정 세균이 특정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파스퇴르는 탄저균을, 코흐는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이후 전염병의 원인과 전파 방식, 치료법 등에 관한 연구가 쏟아졌다. 이제 사람들은 세균은 항생제라는 ‘창’으로, 바이러스는 백신이라는 ‘방패’로 막아내고 있다.
●전염병과 음모론
전염병은 그 가공할 위력 때문에 음모론을 달고 다니며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된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역병은 언제나 ‘분노한 신의 저주’였다.
19세기 초 유럽을 휩쓴 콜레라는 계급을 차별했다. 부자들은 깨끗한 집에 거주하거나 고립된 시골 별장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빈민들 사이에서는 “빈민들을 제거하고 싶어하는 부자들이 퍼뜨린 독”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헝가리 농민들은 성을 포위하고 의사와 장교, 귀족들을 죽였다. 프러시아에서는 의사들이 콜레라 사망자 1명당 얼마를 왕에게서 받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영국에서는 시체들을 해부학 강습소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의사들이 무시무시한 연쇄 살인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20세기 초 스페인독감 때는 독일이 세균전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20세기말 에이즈 창궐에는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음모론이 돌았다.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핵실험으로 생긴 돌연변이가 무해한 바이러스를 살해자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공산주의 국가들을 무너뜨리려고 제조한 것이다, 흑인들을 쓸어버리려는 미국 정부의 발명품이다….
심지어 사스에 대해서도 근거없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전 이후 대미 적대감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거나 중국이 세균무기를 실험하다가 병원균을 실수로 누출했다는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우울한 전망
음모론은 전염병이 사회에 드리우는 그림자일 뿐 전염병의 실체는 아니다. 미국의 국립의학연구소에 따르면 전염병은 그 형태를 바꿀 뿐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한다.
첫째 공중 보건 체계의 붕괴이다. 가난한 나라뿐만이 아니라 부유한 국가에서도 빈민계층이 증가함에 따라 결핵 등이 발생할 수 있다. 또 냉전이 종식되고도 국지적인 분쟁이 끊이지 않아 병원균을 불러들인다는 것.
둘째는 국제 무역과 여행이다. 처음엔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거리만큼만 질병이 퍼지다가 다음에는 말이 뛸 수 있고 배가 항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 나갔다. 이제는 비행기가 전염병을 옮기는 최악의 위험 요인이다. 비행기는 여행자 사업가 군인 이민국 관리 정치적 난민들과 함께 병원체를 퍼뜨린다.
셋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새로운 기술이 미생물에게 새로운 서식지를 만들어 준다는 것. 공기 정화기와 냉난방 시스템은 레지오넬라균을 키웠고 수혈, 장기 이식 등 의료 기술은 에이즈 말라리아 간염 등을 전파하고 있다.
경작지를 만들기 위한 숲의 벌목은 아프리카에 출혈열을 불러왔다. 화석 연료의 사용과 대규모 벌목으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돼 과학자들은 말라리아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돌아올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생물 자체도 빠르게 진화하며 새로운 숙주와 환경에 적응한다. 반면 인간은 노령화와 인공이식 항암치료 등의 영향으로 면역력이 약해지고 있다.
‘바이러스 헌터’의 저자인 C J 피터 박사는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심각한 전염병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무시함으로써 목숨을 잃는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참고자료=이호왕 ‘바이러스와 반세기’ 김우호 ‘바이러스의 세계’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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