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는 2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식에 앞서 취임 축하 결의안이 상정됐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반이 지나도록 결의안은 처리되지 않고 있다.
별로 민감한 사안이 아닌데도 아무도 ‘총대’를 메려 하지 않는다. 미국과 국교를 맺지 않은 대만 관련 결의안들이 바로바로 통과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의 입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한국 입장을 이해하고 제대로 전달해 줄 지한파(知韓派) 네트워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 내 지한파는 △군이나 정보기관 또는 대사관 등에서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 △국무부 등에서 한국 관련 업무를 담당한 사람 △군축 및 핵 등 한반도 문제 전문학자나 저널리스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현 행정부 내에서는 주한미군 근무 경험이 있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일본통이면서도 대북 정책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지한파에 가깝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원장 출신으로 이홍구(李洪九) 전 주미 대사,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장, 한승주(韓昇洲) 주미 대사 등과 각별한 관계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과거 빌 클린턴 민주당 정권 8년 동안 민주당 일변도의 정책을 편 결과로 부시 공화당 정권 내의 지한파 네트워크는 부실한 편이다.
의회 내에는 존 워너 상원의원 등 6·25전쟁 참전의원 6명과 한인 거주 지역구 출신이 많은 하원 한국협의회 소속 의원 40여명이 한국과 관련이 있다.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리처드 루가 상원 외교위원장이나 외교위원회 척 헤이글 의원도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편.
하원에는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 동아태 소위 짐 리치 위원장과 에드 로이스 의원, 북한에 두 번이나 다녀온 마크 커크 의원 등이 있다.
이들 의원이 한국 관련 정책을 다룬다는 것과 한국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평소 이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려는 노력 없이 알아서 해주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 정권 출범을 전후해 정부와 여권 인사들이 분주하게 이들을 접촉했지만 현안이 생겼을 때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합법적인 로비스트도 지한파로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로비활동을 가장 잘하는 나라 중 하나가 대만이다. 그러나 한국은 과거 코리아게이트 등으로 미국 정치인들이 기피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주미대사관 최고위 인사조차 미 의원들과 접촉하기가 쉽지 않다고 외교 관계자들은 전한다. 미 의원들과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교류하는 한국 의원도 많지 않다.
한국 전문가들이 가장 많은 곳은 싱크탱크다. 헤리티지재단의 에드윈 퓰러 회장은 한국의 정관재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해 온 대표적 지한파. 이 재단은 삼성의 지원으로 고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이름을 딴 ‘B C 리 렉처스’ 보고서를 발간하고 한반도 관련 강연회나 세미나를 수시로 개최한다.
언론인 출신 지한파는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국제정책센터의 셀리그 헤리슨 선임연구원 등이 있다.
싱크탱크의 지한파는 다른 부문의 지한파보다 수적으로는 많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급부상한 지난해 10월 이후 미국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준의 한국 관련 세미나 등을 한국 정부가 기획하거나 후원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미국 내 한인교포는 200만여명으로 유대인(600만명)의 3분의 1 규모다. 그렇다고 지한파의 파워가 3분 1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100분의 1도 안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교포들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많다고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말한다. 한국 관련 전문가 모임인 워싱턴의 ‘코리아 클럽’ 회장 오공단(吳公丹) 미 국방연구원 동아시아 책임연구원의 조언은 경청할 만하다. “지한파 네트워킹을 위해서는 긴 안목과 포용력을 갖고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몇몇 유명 인사들에게 의존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젊은 사람들을 발굴해 저변을 넓혀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워싱턴=권순택특파원 maypole@donga.com
▼'386 지한파' 피터벡 "87년 6월항쟁 목격한뒤 매력느껴"▼
“지금처럼 한미관계가 중요한 시기일수록 한국 정부가 미국 내 지한파들을 적극 발굴해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 상황을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한미관계가 잘되기를 바라니까요.”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경제연구소(KEI) 피터 벡 실장(36·사진)은 자칭 ‘386세대 지한파’다.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대 86학번인 벡 실장은 2학년 때인 1987년 짧은 한국 여행 중에 6월 항쟁의 현장을 목격하고 역동적인 한국에 매력을 느껴 한국 전문가가 됐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3년 반 동안 연세대 서울대 외국어대에서 한국어와 한국정치를 공부하고 극동문제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도 근무하는 등 한반도 문제를 파고들었다. 92년에는 한국에서 만난 이혜란(李惠蘭)씨와 결혼까지 했다.
“미국에는 한국 전문가 말고도 한국에서 공부했거나 군인, 평화봉사단원, 선교사 등으로 활동한 사람도 많고 한국인 자녀를 입양했거나 한국인 배우자를 둔 사람 등 한국과 인연이 있는 미국인이 많습니다. 이들처럼 한국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잘 조직화한다면 미국에 한국의 입장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워싱턴=권순택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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