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강당에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한 한 남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오페라 ‘나비부인’ 중 아리아 ‘어떤 갠 날’을 연주할 때 어디에선가 이탈리아어 가사로 그 노래를 읊조리는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비로소 누군가 곁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라보엠’ 중 ‘내 이름은 미미’를 연주했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다시 아리아를 토해냈다.
남자는 라이터를 켜 ‘미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얼굴은 당일 아침 캠퍼스에서 출발할 때 버스 타이어가 펑크나 남자가 타고 있던 철학과 버스로 옮겨 탄 사회학과 3학년 여학생이었다. 철학과 3학년생인 남자가 버스 안에서 오락시간에 ‘짝사랑하던 여자가 지금 우리 버스에 타고 있다’고 애정고백을 했던 여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 실력에 감탄하면서 동이 터올 때까지 말없이 연주와 노래를 이어갔다.
“그녀는 제 인생의 뮤즈였어요. 그때까지 제 몸속의 음악적 재능을 주체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던 제게 등불이 돼 주었죠."》
이 철학도가 바로 현재 한국인 지휘자로는 정명훈 이후 유일하게 유럽 정상의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활약 중인 독일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극장의 상임지휘자 구자범(具自凡·33)이다.
그는 27일과 30일 대구와 서울에서 유럽 정상의 성악가들과 공연할 갈라 오페라 콘서트 지휘를 맡기 위해 한국에 와 있다.
구자범은 일곱 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우면서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절대음감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틀에 박힌 음악 교육을 견뎌내기가 어려웠고 실기 학습을 위해 엄청난 학비를 들여야 하는 풍토가 싫었다.
피아노도 음대생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이고, 그나마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만뒀다.
중고교 때 교회 합창반에서 피아노 반주를 계속했지만 그에게 음악은 도락이었을 뿐 삶의 궁극에 대한 해답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철학을 지망했고 대학원까지 진학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심취했다. 사회의식이 뚜렷해지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혐오증도 커졌다. 그것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예술적 재능과 충돌했다. ‘도대체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이 이 사회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한단 말인가’하는 회의에 사로잡혔다.
“한창 그런 고민에 빠졌을 때 그녀를 만난 겁니다. 그녀는 유명한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제게는 ‘사회운동’보다 재능에 충실하라고 설득했습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나 다니엘 바렌보임처럼 그 재능을 충분히 사회적 동력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결국 ‘미미’와는 헤어져야 했지만 그는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온 유봉헌 나사렛대 교수가 그의 재능을 아껴 무료 지도에 나섰다. 그리고 95년 1월 독일로 날아간 그는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했지만 국립 만하임대 음대 대학원 지휘과에 단번에 합격했다.
심사위원들은 그가 음대 출신이 아니라는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열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동시에 눌렀을 때 그 열개의 계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집어내는 그의 재능에 감탄해 만장일치로 그를 합격시킨 것이었다.
“유명 지휘자 중 음악 외 전공자가 많습니다. 카를 뵘은 법학 박사였고, 주세페 시노폴리는 정신과 의사였죠. 레너드 번스타인과 세르지우 첼리비다케는 저와 같은 철학 전공자고요.”
97년 졸업 때 그는 만하임 음대에 또 다른 전설을 남긴다. 지휘학과 학생으로는 개교 이래 최초로 졸업시험에서 전 과목 만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만하임 국립 오페라극장, 하겐 시립 오페라극장을 거친 그는 2002년부터 다름슈타트의 4명의 상임지휘자 중 최연소 지휘자로 발탁됐다.
“해석학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해석학은 작곡가가 당대에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추론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동시에 현재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주거든요.”
시대를 함께 고민하는 예술을 향한 그의 집념도 꾸준히 실천으로 이어졌다. 97년 독일에서 활약하는 한국 음악가들을 모아 북한어린이 돕기 자선공연을 벌였고 98년 비자 문제로 서울에 반년간 체류하는 동안에는 미아리 철거촌에서 야학교사로 일했다.
“제 필생의 꿈은 한국이 통일되는 그날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지휘하는 거예요. 꼭 지휘자가 아니더라도 합창단원의 한 명으로라도 그 자리에 선다는 상상만으로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의 이번 내한공연은 세 번째다. 지난해 부천 필과 함께한 첫 귀국공연 때 그는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미미’의 포근한 미소를 발견했다.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가 됐다고 들었지만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함께하는 음악의 가치를 일깨워줬으니까요.”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구자범은 ▼
-1970년 서울 생
-1989년 연세대 철학과 입학
-1995년 독일 국립 만하임대 음대대학원 입학
-1996년 독일 만하임 국립 오페라극장 오페라 코치
-1998년 독일 하겐 시립 오페라극장 상임 지휘자
-2002년 독일 다름슈타트 국립 오페라극장 상임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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