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리투아니아계 광부의 자녀 15명 중 11번째로 태어난 브론슨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B-29 폭격기 사수(射手)로 참전한 뒤 영화 쪽으로 진로를 잡은 것도 엄청난 출연료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본래 성(姓)은 ‘부친스키’였지만 1954년 “냉전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브론슨’으로 바꿨다.
영화계 진출 10년 만에 첫 주연을 맡은 액션물 ‘켈리(Machine Gun Kelly·1958년)’에 주목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의 초청으로 일찌감치 유럽에 진출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 느릿하면서도 투박한 어투, 잔혹한 액션 장면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뒤늦게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다투어 그에게 배역을 맡겼다.
196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패러디한 서부극 ‘황야의 7인’에서 스티브 매퀸, 율 브리너 등과 함께 공연했으며 1971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로 뽑혀 골든글로브상을 탔다.
대표작은 악당들에게 부인을 잃은 뒤 냉혹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는 평범한 건축가를 열연한 ‘데스 위시(Death Wish·1974년)’. 3편의 속편이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폭력을 조장한다는 비난에 시달렸던 작품이다. 실제로 미 뉴욕 지하철에서 한 승객이 브론슨을 모방해 자신을 못살게 굴던 불량배에게 총을 쏜 사건이 발생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국내엔 모 화장품회사의 수입브랜드 광고에 등장해 “맨∼담”이란 유행어를 낳았다.
햇병아리 배우 시절 결혼한 동료배우와 헤어진 뒤 1966년 유부녀인 영국 여배우 질 아일랜드에게 공개 청혼, 2년 뒤 결혼했다. 말년까지 영화계의 잉꼬부부로 소문났지만 1989년 아들 제이슨 브론슨이 약물남용으로, 1990년 질이 유방암으로 사망한 뒤 외로운 황혼기를 보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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