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이야기]알쏭달쏭 퀴즈에 머리 굴리는 열도

  • 입력 2003년 9월 18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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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기노쿠니야'의 옥외매장에 설치된 잡학서적 전용코너.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도쿄 신주쿠의 대형서점 '기노쿠니야'의 옥외매장에 설치된 잡학서적 전용코너.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질문1=가장 긴 영어 단어는?

질문2=농구선수 유니폼의 등 번호에 1∼3번이 없는 이유는?

질문3=일본 미국 이탈리아 영국 사람은 우유를 마시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혈액은 왜 붉은색인가?’ ‘공룡의 피부는 무슨 색?’ ‘기네스북이 인정한 세계 최악의 악역은?’ ‘최초로 우주를 여행한 시계 브랜드는?’ ‘달의 뒷면은 왜 우리 눈에 안보일까?’….

요즘 일본 서점가에서 잘 팔리는 ‘잡학(雜學)’ 관련 책을 들척이다가 눈에 띄는 대로 뽑아본 문제들이다.

평균 정도의 상식은 갖고 있다고 자부해 온 기자에게도 모르는 문제투성이다. 아는 것보다 틀리는 게 많다 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다가 푸념이 나오고 스스로를 애써 위로한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이런 문제를 고안해냈담…. 그래 모르면 어때,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참고로 1번의 답은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로 알파벳만 45개. 듣기에도 생소한 의학전문용어(규성폐진증·珪性肺塵症·폐질환의 일종)여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 필요조차 없는 단어다.

2번의 답은 농구의 3초 룰처럼 1에서 3까지 숫자가 들어간 규칙이 많기 때문이라고 잡학 안내서는 설명한다. 국제농구연맹 규정에 ‘선수의 등 번호는 4번부터 15번까지(팀당 등록선수가 12명이므로) 연속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3번의 정답은 일본인은 우유 소비량의 70%, 미국인은 60%를 직접 우유 상태로 마시지만 이탈리아 국민은 우유의 80%를 커피나 홍차에 타 마신다는 것. 영국인은 40%가 홍차 등에 타 마신다.

알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금세 잊어버려도 괜찮은 지식. 이른바 ‘잡학’ 습득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붐을 이루고 있다.

친구끼리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기상천외한 문제를 내 좌중을 감탄시키면 곧이어 다른 ‘선수’가 등장한다. “너희들 이건 몰랐지?”하며 경쟁적으로 자신의 잡학 지식을 뽐낸다. 알면 좋고, 몰라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부담 없는 놀이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는 양상이다.

젊은이의 거리인 도쿄 신주쿠(新宿)의 대형서점 기노쿠니야(紀伊國屋). 입구의 옥외매장에는 잡학서적만을 모은 ‘잡학코너’가 설치돼 있다. ‘1억3000만명의 소박한 의문 650가지’ ‘대화를 돕는 구극(究極)의 잡학’ ‘읽을 수 있을 듯 말 듯한 한자’ 등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는 책들이 진열돼 있다.

잡학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관심은 본래 유별난 면이 있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상식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왔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많이 쓰다 보면 자연히 치매에 걸릴 확률도 떨어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는 게 사회심리 전문가들의 분석.

잡학의 원조로 꼽히는 책 ‘두뇌의 체조’는 1966년 첫선을 보인 이래 23집까지 시리즈로 출간돼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혔다. 1권이 266만부 팔린 것을 비롯해 시리즈 전체의 판매량이 1200만부에 이른다.

일본 대도시의 지하철이나 전철에서는 승객 두 명 중 한 명 꼴로 책이든 신문이든 무언가를 읽는다. 지하철에서 읽히는 책의 절반정도는 넓은 의미의 잡학서적이다.

●역사적 주제도 인기

‘어른들의 문화’였던 잡학이 최근 청소년층까지 확산된데는 공교롭게도 TV의 역할이 컸다. 후지TV가 방영 중인 ‘트리비아(trivia)의 샘’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인생에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알고 나면 신기한’ 문제를 출제하면서 잡학 열기가 고조됐다.

본래 심야시간대에 편성됐지만 인기가 높아지자 7월부터는 매주 수요일 오후 9시의 프라임타임대로 옮겨왔다. 얼마 전에는 일본에서 잘 팔리는 컵라면 20여종을 등장시켜 면발이 가장 긴 제품과 길이를 묻는 엉뚱한 질문을 내보내기도 했다.

잡학서적들이 시시껄렁한 주변의 일상사만을 다루는 건 아니다. ‘쇼와시(昭和史·쇼와 시대의 역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라는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도발과 패망,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을 구가한 히로히토(裕仁)천황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다룬다.

‘옛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 때 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는가’ ‘도쿄 전범재판 때 육군 출신만 교수형을 당한 이유는’ ‘맥아더 암살계획’ 등 무거운 주제도 잡학의 대상이 된다.

일본 언론은 성인 만화와 같은 말초적 흥미에 빠져있던 일본의 청소년을 건전한 지적 탐구의 영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잡학의 순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물론 숲은 못보고 나무만 보는 일본인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배우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무언가를 배우고 머리를 쓰는 태도가 좋지 않을까.

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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