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퀵 퀵? NO, 슬로 슬로! YES

  • 입력 2003년 9월 25일 16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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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라이프 운동의 본거지격인 '카페 슬로' 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슬로 템포로 전환된다

슬로 라이프 운동의 본거지격인 '카페 슬로' 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슬로 템포로 전환된다

《당신이 살고 있는 1분은 몇 초인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한 1분쯤 지났다고 생각되면 눈을 떠 몇 초가 지났는지 확인해 보라. 단, 숫자를 머릿속에서 세지 말 것. 현대인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가를 보여주는 간단한 실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0초 정도 지나면 눈을 뜨고 만다. 1분이라는 시간조차 여유 있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얘기다.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란 것이 있다지만, 일본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고속(高速)의 삶을 살아왔다. 종종걸음 치며 일터에 나가 일개미처럼 죽어라 일하다가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돌아오는 것이 과거 일본인의 전형이었다. 덕분에 고도성장을 이뤄냈지만 곧바로 되돌아온 것은 10년이 넘는 장기불황과 황폐해진 삶이었다. 여기서 반성은 시작됐다. 그리고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연과 인간을 생각하며 삶을 즐기는 ‘슬로 라이프’가 일본에서 조용히 번져나가고 있다.》

●슬로 레스토랑

도쿄 JR고쿠분지 전철역 근처에는 ‘카페 슬로’라는 찻집이 있다. 갈색으로 된 긴 흙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자동차가 붕붕대는 거리와는 달리 시간이 멈춘 듯한 색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넉넉한 공간에 여유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남녀 손님들은 천천히 대화를 나눈다. 가끔씩 종업원이 손님의 옆자리에 앉아 대화에 끼어든다.

이 카페의 하이라이트 이벤트는 매달 둘째, 넷째주 금요일에 열리는 ‘촛불의 밤’. 저녁 7시부터 모든 전기를 끄고 평화의 촛불을 켠다. 처음에는 손님들이 답답해하지만 1, 2분만 지나도 금세 익숙해져 슬로 템포로 움직인다.

슬로 라이프 운동의 본거지 격인 이 카페는 ‘나무늘보 클럽’이라는 이색모임이 주도하고 있다. ‘나무늘보(sloth)’란 중남미 열대림에 사는 키 60cm가량의 작은 동물. 하루 18시간을 나무 위에서 잠자는 나무늘보는 얼핏 경쟁시대의 낙오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사는 나무를 키워가는 ‘공생의 달인’. 나무늘보의 몸에 난 털 속에는 수천마리의 곤충이나 벌레가 기생하며 함께 살아간다. 나무늘보 클럽은 카페 슬로에서 ‘공생의 슬로 라이프’를 추구한다.

팀버랜드의 긴자매장. 시원한 물줄기와 나무, 돌 등으로 구성된 인테리어가 잠시 바쁜 일상을 잊고 느긋한 자연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도쿄=이영이기자yes202@donga.com

도쿄 요요기우에하라역 근처 주택가에 있는 ‘기요즈 키친’. 슬로 푸드 운동가인 미나미 기요타카가 8년 전부터 운영하는 슬로 레스토랑이다. 둥근 유리로 된 한쪽 벽면 안쪽에는 가늘고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숲 속을 연상시킨다.

이곳은 느긋한 분위기도 분위기려니와, 유기농법으로 키운 채소나 고기 등을 이용한 심플한 요리가 유명하다. ‘슬로 푸드’는 맥도널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에 대항해서 생겨난 개념으로 조미료 등 첨가물을 넣지 않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한 자연식품을 뜻한다.

이 레스토랑 주인인 미나미씨는 “과거 선조들의 자연식이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한데 현대인들은 바쁜 삶에 쫓겨 위험한 패스트푸드에 빠져들고 있다”며 “식생활에도 슬로 라이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단테, 안단테

지바현 가모가와에서 면화농장을 하는 다하타 다케시는 20년 전부터 전통 면제품을 짜기를 고집하고 있다. 기계로 짠 수입 면제품이 넘쳐나는 시대, 그는 농장을 돌보고 나서 하루 2시간씩 360m의 면사를 짜고 있다.

언제 제품을 만들어내고 내다팔 수 있을까, 보는 사람은 한숨부터 나온다. 그래도 그는 “천천히 공들여 직접 짠 면만큼 탄력성이 좋고 흡수성이 뛰어난 소재는 없다”며 자신이 짠 면 티셔츠를 늘 입고 다니며 자랑한다. 지금은 이불만 만들어 팔고 있지만 앞으로는 타월이나 티셔츠도 제작할 계획.

일본 내 슬로 라이프 바람이 거세지자 미국계 아웃도어 제품 업체인 팀버랜드는 이를 일본 마케팅의 주요 컨셉트로 잡고 있다.

팀버랜드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도쿄 긴자에 19일 오픈한 단독매장은 입구에서부터 물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더 들어서면 의류나 신발제품 사이사이에 나무와 돌과 이끼가 있고 천장의 유리 위에는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도쿄 요요기우에하라 주택가에 있는 슬로 레스토랑 ‘기요즈 키친’. 자연의 여유를 느끼게 하는 실내 분위기와 유기농법으로 기른 야채나 육류로 만든 자연식 ‘슬로 푸드’가 잘 어울린다. 도쿄=이영이기자 yes202@donga.com

도심 속 매장에서도 교외로 나간 듯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인테리어 의도. 고객들도 물건을 고르면서 ‘작은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제프리 슈와츠 팀버랜드 대표이사는 “슬로 라이프란 반드시 시간개념이 아니다. 단 5분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자연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슬로 라이프, 아웃 도어 라이프인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슬로 시티’ 만들기

시즈오카현 가케가와시의 시계는 어느 도시의 그것보다 한가롭다. 주민들의 삶을 재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구 8만2000명의 이 소도시는 지난해 11월 ‘슬로 시티’를 선언하고 주민의 ‘슬로 라이프’를 시 행정의 최우선 이념으로 삼았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걷자는 슬로 페이스, 기모노 등 전통의상을 입자는 슬로 웨어, 천연식품을 먹자는 슬로 푸드, 오래된 주택에서 여유와 멋을 찾자는 슬로 하우스, 느긋하게 늙어가자는 슬로 에이징, 죽을 때까지 천천히 배우자는 슬로 에듀케이션… 등 슬로 라이프의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이 도시가 추구하는 느긋함은 올봄부터 다니기 시작한 ‘느림보 버스’가 잘 보여준다. 이 버스의 주행속도는 시속 16km. 보통 시내버스의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 성질 급한 사람은 차라리 뛰는 것이 나을 정도다. 지난해 말 열린 슬로 사이클링 대회 때는 참가자들이 30km를 4∼5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거나 끌거나 했다.

가케가와시를 시작으로 2월에는 기후현 다지미시가, 5월에는 니가타현 야스즈카 마을이 슬로 시티 만들기에 동참했다. 기후현은 5월부터 다음달 15일까지를 ‘슬로 라이프 르네상스’ 기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 중이다. 고치현 고치시는 6월 ‘슬로 라이프 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마을 부흥’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런 슬로 붐은 유명 뉴스캐스터 지쿠시 데쓰야(68)의 공도 크다. 그는 자신의 프로인 ‘뉴스23’에서 슬로 라이프 특집을 하고 최근에는 전국 순회강연까지 나섰다. 그는 “과거 50세에도 못 미쳤던 수명이 남자 78세, 여자 84세까지 길어졌는데 삶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며 “자연의 속도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다.

도쿄=이영이기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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