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이야기]노처녀모임 '베이다황' "남자 빼고 다 있어요"

  • 입력 2003년 9월 25일 17시 14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물결과 함께 독신 여성이 증가하는 등 결혼관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사진은 각종 여성지 포스터를 내걸고 있는 베이징 시내의 한 서점.동아일보 자료사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물결과 함께 독신 여성이 증가하는 등 결혼관에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사진은 각종 여성지 포스터를 내걸고 있는 베이징 시내의 한 서점.동아일보 자료사진

‘베이다황(北大荒).’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특히 헤이룽장(黑龍江)성의 황량한 벌판을 뜻하는 말이다. 끝없이 펼쳐진 베이다황에서는 농사짓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풀 한포기 찾기 어려운, 삭막한 곳이 많다. 이는 또 헤이룽장성의 유명한 술(백주·白酒·배갈)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최근 베이다황이 다른 뜻으로 통한다. 본래의 뜻이 변질된 것은 수도 베이징(北京)의 한 독신 여성 클럽이 2001년 모임 이름을 베이다황으로 지으면서부터. 하지만 이 클럽이 언론 보도로 유명세를 타면서 비슷한 독신 여성 클럽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후 독신여성의 증가세를 두고 ‘베이다황 현상’이라는 사회학적 용어도 만들어졌다.

●'백마탄 남자' 좇는 노처녀들

베이다황은 ‘베이징에 사는 30대 전후의 노처녀(다링·大齡)로서 남편이나 남자 친구가 없어서 쓸쓸한(荒凉) 사람’이라는 뜻의 앞 글자를 딴 것. 회원들은 주로 TV 방송국, 영화계, 패션계 등에 종사하는 미모의 여성들이다. 현재 100여명이 넘는 회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분은 비밀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베이징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거나 해외 유학파라는 것. 그런 만큼 나름대로 사회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직장 내 직책은 중간 간부 이상이다. 연봉 수준은 5만∼50만위안(약 750만∼7500만원)의 고소득층. 베이징 시민들의 평균 연봉이 2만4000∼3만6000위안(약 360만∼540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경제적 능력은 상당하다.

당초 이들이 베이다황 클럽을 만든 것은 패션쇼나 방송, 영화 등 작업 현장에서 일을 통해 알게 된 노처녀들이 서로의 일상사나 남자에 대한 감정, 결혼에 대한 가치관 등을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베이다황 회원들은 독신이긴 하지만 독신주의자는 아니라는 게 이 모임 회원들의 말이다. 이들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백마 탄 남자(夢中情人)’를 만나기를 고대한다. 회원들끼리 만나면 일 얘기보다는 남자 얘기에 더욱 열을 올린다는 것.

다만 이들은 스스로의 사회적 성취에 힘쓰고 있는데다가, 자신들이 원하는 ‘멋있고, 능력 있으며, 자상한’ 이상형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독신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

회원들 간에는 모든 화제가 허용되지만 딱 하나 금기 사항이 있다. ‘남자가 없다고 해서 고독을 얘기해서는 안된다’는 것. “외로움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가 즐겁자고 만나는 것”이라는 게 회원들의 설명이다.

통계에 따르면 1990년 베이징과 상하이(上海) 등 대도시의 30∼50세 독신 남성 및 여성은 10만명이 되지 않았으나 2002년에는 50만명을 넘어섰고 그중 60%가 여성들이다.

충칭(重慶)에서 발행되는 신여보(新女報)의 후허룽(胡和蓉) 편집국 부국장은 “독립적 경향이 강한 여성들이 감정이 통하는 남성을 만나지 못한다면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베이다황 현상을 이해했다.

중화여자학원의 자오펑란(趙風蘭) 교수는 “독신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줄어들고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앞으로 능력 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베이다황 현상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통적 결혼관에 반기

한편 이 같은 독신 여성 증가세와는 달리, 마음 맞는 남녀끼리 동거하는 ‘스훈차오(試婚潮) 현상’도 늘고 있다.

상하이의 한 무역 회사에 다니는 류(劉)씨 성의 아가씨는 몇 년 전 자신을 소개하는 입사 이력서로 인해 사내 화제에 올랐다. 그는 당시 이력서에 ‘정치 성향-바이링(白領·흰 넥타이, 화이트 칼라를 뜻함)’, ‘소속 민족-구이쭈(貴族)’, ‘결혼 여부-스훈(試婚)’이라고 써넣었다.

시혼하는 여성들은 과거에는 일시 동거한 뒤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결혼에 골인했으나 최근에는 결혼보다는 ‘성적인 문제’를 편리하게 해결하기 위해 동거하는 경우가 많다.

류씨는 “회사 업무 때문에 청두(成都) 충칭 주하이(珠海) 광저우(廣州) 등지를 하루가 멀다하게 출장을 다닌다”면서 “한 도시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데 고정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시혼의 동기를 밝혔다.

류씨의 고백에 따르면 과거 대학 친구와 동거하다 지금은 회사 남자 동료와 함께 사는데 그와도 곧 헤어질 예정이다. 류씨는 베이징에 가서 관리학 석사 과정을 밟으려고 하는데 동거하는 남자는 회사의 홍콩 지점에 파견될 예정이기 때문이라는 것.

개혁 개방과 함께 서구의 자본주의 풍조가 유입되면서 현재 중국에서는 전통적 결혼관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회 현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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