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아프리카 대륙을 유린할 당시 유일한 독립국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온 ‘시바의 왕국’ 에티오피아는 아샹기 호수에서 대패해 이듬해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이탈리아 전차군단에 내주고 만다.
승전 소식에 고무된 무솔리니는 로마 광장에 모인 40만 군중 앞에서 ‘이탈리아의 솔로몬’임을 자임했다. 에티오피아는 솔로몬과 시바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를 국조(國祖)로 떠받들고 있다.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친 것은 국내 커피 수요를 조달하려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 정치적 배후의 동력은 ‘팽창에의 욕구’였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말한 대로 ‘현상에의 불만’과 ‘보다 넓은 생존공간에의 열망’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정치적 레토릭이었다.
유럽은 파시즘의 광기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무솔리니가 집권하자마자 그와 정치적 흥정을 벌였던 로마 교황청은 에티오피아 침공을 지지했다. 국제연맹은 뒷전으로 물러앉았다.
유럽의 지성계는 더욱 심각한 균열을 보였다. 1938년 9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개국이 모여 독일과 이탈리아의 침략전쟁을 사실상 묵인하는 ‘뮌헨협약’을 체결하자 로맹 롤랑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지지를 보냈다. 장 지오노는 “나는 어떠한 평화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공언했다.
‘파쇼(fascio)’가 이탈리아 말 그대로 ‘한 묶음’의 광기를 내뿜는 동안 유럽의 지식인 사회는 사분오열된 채 허둥댔다.
사르트르와 유명한 ‘공산당 논쟁’을 벌였던 작가 폴 니장은 이렇게 질타했다.
“파시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쿠데타를 한 것이 아니고 의회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단순히 정치적 변란(變亂)으로 봐야 하는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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