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프로젝트]<19>페루 찬찬 고고유적

  • 입력 2003년 10월 16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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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제3의 도시 투르히요.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560km 떨어진 인구 65만명의 해안도시다. 지난달 26일 투르히요 연안의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은 그다지 세지 않았는데도 파도는 높고 거칠었다. 이 바다에서 5km 떨어진 곳에 흙으로만 만들어진 도시로는 세계 최대규모인 ‘찬찬 고고유적(Chan Chan Archaeological Zone)’이 있다. 찬찬은 약 800년 전인 13세기 초에 번성했던 치무왕국의 수도. 15세기 중반 잉카제국에 멸망할 때까지 왕국의 수도였다.》

페루정부 산하 문화청(INC) 직원 아르투로 파레데스(49)의 차를 타고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투르히요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도로 양쪽에 보이는 흙 구조물들이 유적으로 특별히 입구도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18km²의 찬찬 유적은 모든 건축물이 ‘어도비(햇볕에 말린 흙벽돌)’와 ‘어도본(흙담)’으로만 지어졌다. 유적지 중심부에는 성벽에 둘러싸인 왕궁(최대 가로 300m, 세로 600m) 10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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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찬찬 유적 가운데 추디궁의 개인 기도실(큰 사진). 마름모꼴의 어도본(흙담)이 공간을 나누고 있다. 오른쪽 그림은 유적 중심부에 있는 10개 궁의 입체도. 이 중 복원된 것은 추디궁뿐이다. -투르히요=김성규기자

이들 왕궁 가운데 추디궁만 공개되고 있다. 궁의 이름은 19세기 중반 이곳을 처음 연구한 스위스 고고학자 요한 본 추디의 이름을 땄다.

이 궁은 ‘프리메라 플라자 세레모니얼(의식의 광장)’로 명명된 종교 행사용 광장, 개인 기도실, 왕의 시신을 보관하는 시신 보관실, 창고, 저수지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 의식의 광장 하나의 크기가 축구장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것과 같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추디궁 일부를 제외한 다른 건축물은 성벽이 대부분 허물어지고 바람에 날려온 흙에 덮여 방치돼 있었다. 정부의 지원부족으로 전체 유적의 1000분의 1가량만 복원된 상태.

페루 명문 사립 카톨리카 대학의 고고학 교수 크르지스크토프 마코우스키(51)는 “페루의 지배 엘리트인 백인은 자신들의 문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페인 점령기 이전 원주민의 토착 문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유적지 안에 220여가구가 살고 있었을 정도로 방치됐다. 1998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유적지 안의 거주자들을 내보냈지만 아직도 이들의 경작지 일부가 남아 있다. 페루 정부는 1964∼1970년까지 유적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을 벌였지만 기술과 지식 부족으로 오히려 유적을 훼손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몇 년에 한번씩 페루 해안에서 발생하는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연간 강수량이 10mm도 채 안되는 건조한 이 지역에 폭우가 내려 진흙 벽이 크게 훼손됐다. 염분을 머금은 바닷바람도 흙벽을 부식시키고 있다.

파레데스씨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지하수를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지하로부터 물이 차올라 유적지가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페루 정부가 유적 복원에 보존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는 인식을 한 것은 1986년 유네스코(UNESCO)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후. 같은 해 ‘위기에 처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페루 정부가 보존 작업에 미온적이자 국제사회도 나섰다. 문화보존 국제단체들이 88년 유적보존을 위한 ‘가이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당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유네스코 및 유네스코 산하 문화유산보존 및 복원국제연구센터(ICCROM), 미국의 문화재 관련 민영단체인 게티보존연구소 등은 INC와 함께 96년 가이아 프로젝트의 후신격인 ‘PAT99 프로젝트’와 99년 ‘테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두 프로젝트에는 미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에콰도르 등이 참여했다. 당시 각국의 고고학자들은 찬찬 유적 복원 및 보존에 관한 세미나를 45일 동안 열었다. 유럽연합(EU)과 이탈리아 정부에서도 이 프로젝트에 20만달러의 돈을 후원했다.

이와 별도로 유네스코는 97년부터 페루 정부를 도와 찬찬의 복원과 보존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우도록 했다. 마스터플랜은 고고학뿐 아니라 역사학 사회학 관광학 등을 전공한 미국 프랑스 페루 중남미의 학자 40명이 참여해 5년여 만인 지난해 말 완성됐다.

이 마스터플랜에 따라 찬찬 유적 복원에 1637만4637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학자들이 만든 세부계획은 A4용지로 책자 7권, 4000쪽에 이른다. INC와 유네스코는 자금을 마련하는 대로 12년에 걸쳐 이를 시행에 옮길 예정이다.

유네스코 페루 문화재 담당인 키로 카라발로 페리키는 “문화재 복원과 보존은 장기적 지역개발과 관광수입 증대 등이 병행돼야 한다”며 “다른 나라에서 돈을 끌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관광수입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INC는 찬찬 유적의 관광 서비스를 지난해에야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해 관광수입은 6만솔(약 2000만원)로 추디궁 1년 관리비의 10% 수준에 불과했다.

투르히요=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찬찬유적은… ▼

찬찬은 13∼15세기 중반 크게 번성해 지금의 페루 북부 연안과 중앙 연안을 지배했던 치무왕국의 수도. 약 6km²의 중심부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0개의 왕궁 또는 구역이 있다. 각각은 신전, 광장, 통로, 저수지, 정원, 시신 보관소 등으로 구성돼 있다.

모든 건축물이 흙으로 만든 어도비와 어도본으로 지어졌다. 추디궁의 ‘대응접실’ 벽면에는 새와 물고기, 기하학적 무늬 등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치무왕국은 영토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남쪽의 잉카제국과 맞닥뜨리면서 멸망으로 이어졌다. 잉카제국과 1462년부터 전쟁을 벌여 패망한 것.

치무왕국은 정교한 관개시설로 유명하다. 불모의 사막지대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최장 32km에 이르는 관개수로로 엄청난 양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관개시설 덕분이었다. 당시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됐으며 계급과 서열이 엄격했다. 인구는 전성기에 7만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 은을 비롯한 금속 세공기술이 특히 발달했다.

▼"돈-인력 모자라 복원 부진 자자손손 발굴해도 못 끝낼것"▼

투르히요 시내의 고풍스러운 자택에서 만난 페루 INC의 찬찬 유적 복원 및 보존 담당부장인 아나 마리아 호일(55·사진)은 정부의 무관심에 불만이 많았다. 미혼인 그는 투르히요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면서 찬찬 유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75년 INC에 들어갔다. 국립박물관보다 더 많은 유물을 갖고 있다는 리마 시내의 라파엘 라르코 박물관 설립자 라르코 호일이 그의 삼촌이다.

―찬찬 유적의 보존과 복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인력과 돈이다.”

―관광지로 개발하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텐데….

“맞다. 정부는 찬찬 같은 거대한 유적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면 몇십 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90년대 초 페루의 은행가 프란시스코 비세는 치카바 지방의 엘부르코 유적지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데 6만달러를 투자했다. 관광지 개발이 가져온 경제 효과는 1000만달러에 이른다. 유적지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커버스토리를 장식하는 바람에 비세 가문은 100만달러의 홍보 효과도 누렸다.”

―인력이 왜 부족한가.

“정부가 문화유적 복원에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멕시코만 해도 교수가 유적을 발굴하겠다고 하면 2년간 강의를 면하게 해주고 급여의 3배를 준다. 페루는 학자들이 유적 발굴에 신경 쓰면 수입이 더 줄어든다. 이러니 누가 유적 발굴에 나서겠는가.”

―돈은 어디서 구할 셈인가.

“다른 나라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가장 부자니까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제일 좋다.”

―유네스코 등 국제단체에서 도움을 주고 있지 않은가.

“재정적 도움은 별로 없다. 기술적 측면에서는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국제단체나 다른 나라들이 찬찬을 비슷한 종류의 유적 발굴을 위한 실험장으로 여기는 측면도 있다. 한 마디로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어느 정도 복원됐나.

“전체 유적의 1000분의 1이나 될까….”

―할 일이 많아서 고고학자로서 행복하겠다.

“맞다. 손자의 손자들까지 발굴한다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투르히요=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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