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논신화' 미타라이 "평생직장 보장,인간존중 경영이 비결"

  • 입력 2003년 10월 27일 18시 46분


《입사 후 23년간 미국 현지법인에서 근무한 미국통. 캐논USA 사장 시절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과 절친해 함께 골프를 치며 경영기법을 자문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영기법을 일본 특성에 맞게 ‘현지화’해 캐논을 초우량기업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의 비즈니스 위크는 지난해 미타라이 사장을 일본의 전형적 최고경영자(CEO)의 ‘컨센서스형’과는 다른 결단력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아사히신문에 매월 1, 2회 고정칼럼을 연재하는 등 문필력도 상당하다. 좌우명은 ‘깊이 생각하되 결단은 과감히 하라’는 뜻의 ‘숙려단행(熟慮斷行)’.

△1935년 오이타(大分)현 출생 △61년 주오(中央)대 졸업 후 캐논 입사 △79년 캐논USA사장 △1993년 도쿄본사 부사장 △95년 대표이사 사장》

“글로벌 스탠더드와 미국식 스탠더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미국 기업이 효과를 거둔 방식이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각각의 실정에 맞는 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미타라이 후지오 사장이 자신의 고향인 오이타현의 캐논 공장에서 여사원과 함께 막 조립이 끝난 디지털카메라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캐논 성공신화’를 이끌고 있는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 富士夫·68) 사장은 27일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기술개발, 재무전략 같은 세계 공통의 영역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야 하지만 ‘사람’과 관련된 분야는 문화적 정서적 특성에 맞춘 로컬화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미국 현지법인에서 23년간 근무한 그가 종신고용과 애사심으로 상징되는 일본식 경영의 신봉자라는 점은 의외였다.

미타라이 사장은 “인간존중이라는 관점에서 기업을 경영하니까 돈도 많이 벌고 사원들도 행복해 하더라”고 말했다.

―일본이 극심한 불황에 빠진 최근 4년간 캐논은 매년 최고이익 기록을 경신해 왔다. 비결은 무엇인가.

“자신 없는 사업에서 과감하게 발을 빼고, 잘할 수 있는 곳에 집중했다. 취임하자마자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이익을 못 내는 사업, 당장은 흑자지만 장래성이 떨어지는 사업은 깨끗이 정리했다. 여력으로 다른 기업보다 강점이 있는 분야에 주력했다.”

―현실적으로 기업의 덩치도 중요한데 경영자로서 미련은 없었나.

“기업이 이익을 못 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캐논은 지금 하고 있는 사업에서 일본 1위, 세계 1위가 목표다. 회사 전체의 위신은 그 다음 문제다.”

미타라이 사장은 취임 직후 미미하나마 이익을 냈던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했다. 정보기술(IT) 산업의 핵심인 컴퓨터를 포기하기까지 진통이 적지 않았지만 제품 개발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12개 계열사를 프린터 복사기 카메라 광학기기 등 4개 핵심계열로 재편했지만 이 과정에서 본인의 뜻에 반해 회사를 그만둔 직원은 단 1명도 없었다.

―흔히 기업이 어려워지면 많은 경영자가 감원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캐논이 감원 방식을 쓰지 않는 이유는….

“고용을 보장하는 게 기업과 사원 모두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원 1명을 키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이런 사원을 내보내는 건 손해다. 고용불안이 없으면 종업원은 안심하고 일에 집중해 능률이 높아진다.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눈앞의 실적뿐 아니라 10년, 20년 뒤의 회사를 고민하며 길게 보려 애쓸 것이다.”

미타라이 사장은 “기업의 힘은 사원 각자가 가진 능력의 총합”이라며 직원들의 사기와 애사심을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로 꼽았다. “캐논은 일본에 뿌리를 둔 일본 기업이고 사원들은 일본 국민”이라며 “만약 상황이 나빠지면 감원 대신 봉급삭감 쪽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생산방식을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에서 셀 시스템으로 바꾼 것도 인간존중 경영과 관계가 있는가.

“컨베이어벨트 방식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근로자라도 주어진 목표 이상의 실적을 낼 수 없다. 창의력을 발휘할 여지가 적다. 셀 방식으로 바꾸니 30명이 투입되던 작업이 20명으로 줄어들고, 나중엔 10명만으로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게 됐다. 근로자는 자신이 이룬 성취에 만족감을 느낀다. 이게 행복 아닌가.”

―캐논이 시가총액에서 소니를 추월한 것이 화제가 됐는데….

“매출은 적지만 이익을 많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캐논은 차입금이 없어 투자자 입장에서는 안심하고 주식을 살 수 있다.”

―그럼 캐논은 이제 일본의 대표기업이 된 것인가.

“무슨 말씀…(웃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의 대표기업이라면 역시 도요타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캐논은 일본에서 주목받는 정도일 뿐이고 세계적으로는 중견기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좋은 기업이냐, 아니냐는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고 캐논은 매년 5~10% 이상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며 일본의 간판기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캐논은 차입금이 거의 없다. 현금중시 전략을 고집하는 이유는….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는 투자에 따른 실패 확률도 높다. 빚을 내서 투자했다가 실패하면 기업의 존립이 위협받는다. 자기 돈으로 투자하면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지 않는가.”

―미국식 기업지배구조를 일본 기업에 적용하는 것에 비판적인데….

“이사회와 집행부가 분리된 미국식 모델은 사회의 유동성이 큰 미국에 적합하다. 종신고용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임원이 되려면 수십년간 다각도로 평가받는 과정을 거친다. 굳이 외부인사를 초빙해 경영진 인사를 맡길 이유가 없다.”

―아시아 기업이 미국 기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국 기업을 흉내낼 필요는 없지만 의사결정의 신속성은 배워야 한다. 승진과 급여의 연공서열식 관행도 없애야 한다. 캐논은 사원의 일자리는 보장하지만 승진과 급여는 철저하게 실적에 따라 평가한다.”

그는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을 보면 활력이 느껴진다”며 “양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은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parkwj@donga.com

▼캐논의 역발상 생산혁신▼

올 4월 9일 도쿄주식시장의 거래가 마감되자 증시 주변이 잠시 술렁댔다. 전후 반세기 이상 일본의 간판기업으로 군림해 온 소니의 시가총액이 캐논에 밀려 2위로 떨어졌기 때문.

소니의 시가총액이 3조7203억엔까지 떨어진 반면 캐논은 시가총액 3조7451억엔으로 전기기기부문 1위에 올랐다. 일본 언론은 “캐논이 소니를 제치고 일본 하이테크업체의 간판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6년 전인 97년만 해도 캐논의 시가총액은 소니의 5분의 1에 불과했기에 이것은 충격이었다. 이후 캐논의 호조와 소니의 부진이 맞물리면서 시가총액 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일본이 경탄한 캐논의 승승장구=캐논은 작년 1970억엔의 순이익을 낸 데 이어 올해도 2500억엔 이상의 순이익(세후)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1999년 이후 5년 연속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셈. 장기불황으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고전하는 중에 일궈낸 실적이어서 더욱 주목을 끈다.

캐논의 호조는 복사기 스캐너 등 사무기기가 잘 팔린 데다 신제품 디지털카메라가 잇달아 히트를 쳤기 때문. 제품 구색은 단출하지만 컬러복사기, 레이저프린터 부품 등 모든 제품이 이익을 내는 탄탄한 수익구조를 갖췄이다.

▽역발상의 혁신=캐논은 미타라이 후지오 사장 취임 후 미국식 대량생산의 상징인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을 공장에서 추방했다. 직원의 업무능력과 상관없이 천편일률적인 작업속도가 유능한 숙련공의 능력 발휘를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대신 몇 명이 팀을 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셀(Cell·세포) 방식을 도입했다. 단순작업을 되풀이하는 기존 방식보다 지루하지 않아 능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

캐논 관계자는 “전 세계 시장의 주문 상황에 맞춰 모델별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체계를 갖춰 재고관리와 유통비용을 줄였다”고 말했다.

대다수 기업들이 앞 다퉈 중국으로 진출하는 흐름과 다른 길을 걷는 것도 특징. 오히려 중국에서 생산해 온 저가 생산품을 일본에서 만들기 위해 전자동 생산라인을 도입키로 했다. 중국의 인건비가 일본보다 낮지만 전자동으로 생산하면 중국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선진국 소비자들이 중국산 제품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메이드 인 저팬’의 효과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캐논을 배우자’=몇 년 전 닛산자동차의 최고경영자(CEO)인 카를로스 곤 사장이 감원을 통해 파산 직전의 닛산을 살려내자 일본 경제계에서는 ‘서구식 경영만이 살길’이라는 흐름이 확산됐다.

이런 풍조에 제동을 건 것이 캐논 모델.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도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다는 점을 실증해 보이자 경제전문가들은 “21세기 일본식 경영모델이 등장했다”며 흥분했다.

캐논은 연구개발(R&D) 투자를 매출의 8%까지 끌어올려 지난해 미국 내 특허권 취득건수에서 IBM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미타라이 사장은 장기불황으로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본 국민들에게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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