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 초기 국가경제협의회(NEC) 의장으로 출발해 나중에 재무장관으로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했던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공동회장이 회고록 ‘불확실한 세상에서(In an uncertain world)’를 펴냈다. 다음은 파이낸셜 타임스가 입수해 10일 게재한 회고록 1부의 요약.
1992년 12월 클린턴 대통령 당선자가 소집한 첫 NEC가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열렸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나에게 선거참모 진 스펄링은 “월 스트리트의 갑부가 보통사람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무표정하게 “당신 말이 맞아”라고 대꾸했지만 당선자가 웃을 때까지 분위기가 어색했다.
이듬해 1월 보좌진과 첫 예산 관련 회의를 열었다. 당선자와 막역한 사이였던 조지 스테파노플로스 고문(후일 백악관 대변인)은 “재정적자 감축을 섣불리 확약하면 선거공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회의 시작 1시간도 안 돼 당선자는 “재정적자 감축은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95년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부유층의 세금을 깎아 주기 위해 백악관이 제안한 중산층 의료혜택 강화법안에 반기를 들었다. 공화당 수뇌부와 협상장소에 앉았지만 진전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공화당의 강공으로 협상은 결렬됐지만 대통령은 중산층 복지예산을 살릴 수 있었다.
뉴트 깅리치 당시 하원의장(공화당)의 강경한 태도로 연방정부는 폐쇄됐다. 나는 정부 이자를 갚기 위해 폐쇄 3일 전 퇴직신탁기금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긴급인출권을 발동했다. 깅리치 전 하원의장 등은 격분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여론은 공화당에 부정적으로 돌아섰다.
재무장관 재임 중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나의 입’이었다. 강한 달러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피력했지만 더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98년 6월 상원 청문회에서 엔화 약세를 저지하기 위한 시장개입 가능성을 물어왔다. “엔화 약세는 일본경제 실상을 반영한다”고 대답했다. 15분 뒤 옆에 앉은 래리 서머스 차관이 “엔화가 (내 발언으로) 3엔이나 주저앉았다”는 메모를 보여줬다. 시장이 내 발언을 엔화 하락을 방치할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청문회 막바지에 나는 “여느 때처럼 필요하면 개입하고, 필요치 않으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붙여야 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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