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이야기]파리/'파리의 감동'은 지하철서 시작된다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7시 31분


프랑스 파리 도심의 지하철역 구내에서는 놀라운 실력을 갖춘 음악가나 댄서들의 공연이 항상 열린다. 지하철에서 연주하려면 오디션을 통해 ‘메트로 예술가’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프랑스 파리 도심의 지하철역 구내에서는 놀라운 실력을 갖춘 음악가나 댄서들의 공연이 항상 열린다. 지하철에서 연주하려면 오디션을 통해 ‘메트로 예술가’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는 ‘특별한 오디션’이 열렸다.

클래식 및 대중음악 연주자, 댄서와 무언극 공연자 등 예술가 1000여명이 참가한 이 오디션의 장소는 도심의 한 지하철 역 구내였다.

심사위원 가운데 5명은 전문예술인이 아닌 음악애호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하에서 일한다는 것. 2명은 지하철 운전사, 3명은 지하 점포나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이날 오디션을 통과한 360명에게 주어진 것은 ‘메트로(Metro·지하철) 예술가’ 자격증이었다.

○ 반년에 한번씩 엄격한 재심사

파리에서 지하철 악사의 연주를 듣고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라고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오디션을 거쳤기 때문. 파리지하철공사(RATP)는 파리로 몰려든 세계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지하철로 몰려 판을 벌이자 ‘파리 지하철의 수준’을 관리한다며 1997년부터 오디션 제도를 도입했다. ‘메트로 예술가’ 자격증을 얻은 연주자에게만 지하철 공연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RATP가 ‘메트로 예술가’를 뽑을 때 예술성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은 음악이나 공연이 지하철 환경과 이용객의 수준에 맞느냐다. 지하에서 일하는 비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격증을 받은 사람은 1년에 16유로(약 2만2400원)만 내면 언제나 연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반년에 한번씩 재심사를 받고 자격증을 갱신해야 할 정도로 관리는 엄격하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메트로 예술가’의 국적은 프랑스(45%) 동유럽(11%) 남미(10%) 순. 이들 중에는 지하철 이용객이 던지는 하루 평균 40∼70유로(약 5만6000∼9만8000원)의 동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예술가도 있고, 무대 경험을 쌓거나 다른 음악가와의 교류를 통해 예술적 지평을 넓히려는 음대생도 있다.

더러는 대형음반사 기획자의 눈에 들어 스타의 꿈을 이루려 한다.

‘지하철 무대’에서 이미 스타급에 속하는 아르헨티나 출신 팬파이프 연주자 미구엘 라브는 “내가 연주하는 동안 어떤 실력자가 지나갈지 모른다”고 말했다.

가끔은 지하철 공연에서 발탁돼 정식 무대에 데뷔한 음악가들이 벌이는 고별공연도 열린다.

‘메트로 음악가’들은 올해 ‘환승역(Correpondances)’이라는 타이틀의 첫 CD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 음반에 수록된 14개 곡은 파리의 지하철 노선 14개를 상징한다.

이 음반에는 자기 아이들을 위해 작곡한 노래를 지하철에서 부르기 시작한 주부 가수 레이첼, 알제리 출신의 6인조 형제그룹 세바, 집시 그룹 룰루 진, 세네갈 출신의 기타리스트 셰리프 음바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를 부른 지하철 성악가 마리 헨 왈레 등의 음악이 실려 있다.

○ 지하철기관사가 비번땐 악사

마지막 곡을 장식한 장 미셸 그랑장은 지하철 8호선 현직 운전사. 그 역시 비번인 날은 지하철역에서 노래한다.

이번 음반 제작에는 파리에 거주하는 영국인 금융가이지 음악애호가 알렉산더 로저스의 힘이 컸다. 그는 반년동안 지하철을 샅샅이 뒤지며 자격증을 가진 360명의 음악을 거의 다 들었다.

그는 개인 돈 7만유로(약 9800만원)를 들여 RATP와 공동으로 음반을 냈다. 이 음반 발매를 계기로 기타리스트 셰리프는 대형 음반사와 계약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반작업은 엄두도 못내는 많은 ‘메트로 예술가’들에게는 길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파리의 라 모트 피케 역에서 만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는 “경제는 나빠지고, 지하철 이용객의 발길은 점점 빨라진다”며 “차분히 음악을 들어주는 파리지앵이 줄면서 수입도 줄고 있다”고 말했다.

○ 지친 이들에게 위안이 되길…

불법이민이 늘면서 무자격 악사들이 급증하는 것도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가끔은 술 취한 채 객차에 들어와 ‘아슬아슬하게’ 멜로디를 이어가는 무자격 악사 때문에 승객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파리는 ‘메트로 예술가’들이 있어 넉넉하고 푸근하다. 몇 번이라도 파리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안다.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 환승 통로에 울리는 빠른 리듬의 아프리카 타악기, 고즈넉한 한밤 플랫폼에서 퍼지는 팬 플루트, 노을 진 센 강 위로 지나는 지하철 객차에서 듣는 바이올린 선율이 생활에 지친 이에게 어떤 흥겨움과 위안, 혹은 여수(旅愁)를 선사하는지….

박제균 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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