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동북지역으로 불리는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 일대는 중국 역사에서 하나의 공백이었다.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안에서는 이 동북3성을 ‘관외(關外)’라고 불렀으며, 이와 대비해 스스로를 ‘관내(關內)’라고 했다. 만주는 중국의 ‘밖’이었던 것이다. 만주는 버려진 황무지, ‘대황(大荒)’이었다. 만주가 중국으로 편입된 것은 중국이 만주의 지배를 받게 되는 청(淸·1616∼1912) 건국 이후의 일이니 역사적으로 보면 만주는 ‘신생 중국’인 것이다.
게다가 만주는 조선과 ‘중복 공간’이었다.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와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이 문제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만주는 일본과의 ‘분쟁 공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족인 청의 마지막 황제를 이용해 만주를 중국과 분리시켰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의 ‘고구려 열광’도 이러한 중국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수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남북통일과 소수민족 독립에 대한 중국측의 대응으로 보는 것은 물증도 없고 우리에게 도움도 되지 않을 듯하다.
‘중화(中華)’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가 다시 ‘용’으로 승천한 중국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존적’이고 ‘방어적’일 수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역사적 불안감’의 표출이면서 ‘공격적 정책’이 아니라 ‘방어적 정책’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시나리오는 ‘외교적 대응’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외교문제로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한일 역사 문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일 역사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현대사이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은 여전히 고대사 연구일 뿐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상호주의적 대응’이다. 즉, ‘동북공정’에 필적할 만한 연구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는 것이다. 필요한 대응으로 보인다. 단, 중장기적이면서 공정한 안목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민관협동’도 좋고, ‘국제적 공동연구’도 바람직하고, ‘남북공조’도 가능하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포용적 대응’이다. ‘역사와 지리 교과서 개정을 위한 독일-폴란드 위원회’를 벤치마킹한 ‘한중 역사공동위원회’를 제안하는 것이다. 독일-폴란드 사이의 이 위원회는 1970년 양국 유네스코 위원회가 발의한 이후 1976년 4월 권고안 편집을 마무리했다. 양국 민족의 기원에서부터 독일의 폴란드 병합 등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성공적으로 권고안을 제출했고, 양국은 교과서를 수정했다. ‘포용적 대응’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성숙한 한중관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양기웅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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