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박선영 박사(38·동아시아 현대사)는 "중국이 간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고구려사의 자국사 귀속 등 동북지역 역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 박사는 한국중국학회가 이달 중순 발간하는 반년간지 '중국학보' 48집에 실릴 논문 '혈맹과 선린우호의 함수관계 사이에 남겨진 국경문제: 간도 문제를 중심으로'에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 빚어진 간도 영토 분쟁의 의미를 짚었다.
▽간도 분쟁 왜 일어났나
간도의 구체적 영역에 대해서는 한중간, 그리고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크다. 1909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에서의 간도는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와 거의 일치하는 북간도(또는 동간도)를 말한다.
간도는 영토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 청나라와 조선의 변경지대로 조선인들이 15세기경부터 이주해 개간하고 살던 곳이다. 그러나 청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封禁)지역으로 지정해 조선인과 한(漢)족의 출입을 막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안동선 철도(안동~봉천) 개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주었으며, 1952년 옌볜조선족자치구(1955년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식민지시대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협력한 대가로 간도 할양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1962년 중국이 한국전쟁의 참전 대가로 북한에 백두산 지역 양도를 요구했으나 북한의 요구대로 백두산 천지를 분할해, 간도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더 이상 요구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박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간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던 이유는 간도가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세력이 접촉하는 완충지대이자 동서를 장악하고 남북을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구비한 요지이기 때문이다. 간도는 또 토지가 비옥하고 금 은 석탄 구리 철광 등 광석이 풍부하며 장백산 북쪽 산기슭을 경유해 선양(瀋陽)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중국 학계는 조선인의 간도 이주를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시행한 이후인 1860~70년대의 근대 이민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 박사는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한 시점은 15세기경이며 봉금정책으로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조선인의 이주나 개간은 멈추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간도협약 이전 간도는 명확한 국경선 없이 양국 주민들이 혼재한 상태였고, 양국의 행정력이 동시에 존재했던 '복수 주권(multiple sovereignty)'의 지역으로 봐야 한다는 것.
또 동북지역이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韓)민족이 30세기 동안 지배해온 땅이고 발해가 망한 뒤 거란과 여진이 지배한 일이 있었지만 한(漢)족이 동북을 완전히 지배한 일이 없었다는 점도 우리 측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주요 근거다.
박 박사는 "간도협약은 일본이 외교권을 불법 사용한 것이므로 간도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작업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간도문제에 천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국제법규과 관계자는 "간도가 역사적으로 우리의 영토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므로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법 논리도 보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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