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국적회복 헌법소원’ 첫 번째 청구인인 이철구씨(65·사진)는 지난달 서울 강동구 명일동 명성교회에서 국적회복을 요구하며 다른 중국 동포 500여명과 함께 보름 넘게 단식 농성을 했다. 그는 농성을 마친 뒤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938년 2월 부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6세 되던 해 일제의 만주 개간정책으로 여동생 이정자씨(당시 2세) 등 가족과 함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연수현으로 강제 이주됐다. 누나 이용순씨(70)는 큰집에 남았다.
아버지는 53년에 “큰 딸을 못 보고 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2년 뒤 지병으로 숨졌다. 중국에서 소학교 교사, 농업, 잡화상 등을 하던 이씨는 우연히 90년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누나 용순씨가 이산가족찾기운동본부에 보낸 사연을 들었다. 이씨는 누나의 초청으로 그해 10월에 한국 땅을 밟았다.
“중국에서 계속 수소문하며 누나를 찾았죠. 50년 만에 인천부두에서 누나를 만났는데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껴안고 대성통곡했습니다.”
이씨는 체류기간을 넘겨 한국에서 지냈다. 이씨는 공사현장 작업반장으로, 부인 최순자씨(63)는 산부인과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이씨는 93년 국적회복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동사무소를 돌아다니며 절차를 물어봤다. 그러나 “당신은 불법 체류자니까 신청할 자격도 없다”는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다. 이씨는 정부의 불법 체류자 합동단속이 시작되자 고국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지난달 14일 국적회복을 신청했다. “딸과 사위도 96년에 귀국해 같이 살았지요. 딸 부부는 단속을 피해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갔죠.”
이씨 부부는 “딸이 보고 싶지만 중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는 아무 서류도 없고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국적을 회복시켜주던데…. 우린 왜 안 됩니까.” 그의 애절한 항변이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외국 국적회복 사례▼
200만명으로 추산되는 중국 동포는 1885년 이후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또는 2, 3세들이다.
1885∼1910년에 약 26만명, 한일병합 이후 1920년대 말까지 약 48만명이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의 핍박을 못 이긴 농민이거나 독립투사들.
1930년대에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개간 정책을 펼치면서 무려 100만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세금을 내거나 항일 모금활동, 무장투쟁 등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광복 직후 중국에 있던 조선인 216만여명 가운데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100만명 정도. 남은 이들은 남북 분단,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6·25와 냉전 등으로 인해 1980년대까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제3국을 통한 입국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 동포들은 1988년 노태우(盧泰愚) 당시 대통령의 대공산권 외교 정책인 7·7선언 이후에야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한국은 중국 여권과 국적을 인정했으며 중국 동포들은 중국 여권으로 입국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고 한국 정부가 조선족 정책에 참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도 1992년 한중수교 때 중국의 이 같은 입장을 사실상 수용했다. 하지만 한국 국적 취득을 원하는 중국 동포들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모국이 주권국가였던 민족은 조선족뿐”이라며 “일제 때 강제 이주당했으며 남북분단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특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 패전으로 땅을 빼앗겨 폴란드와 구소련에서 살게 된 독일계 외국인들에게 독일 통일을 전후해 일괄적으로 국적 회복 기회를 준 적이 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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