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이라크파병 독자지휘권 반드시 필요”

  • 입력 2003년 12월 19일 18시 59분


《“인터뷰에 앞서 불평부터 털어 놓겠습니다. 해외 파병처럼 중대한 국가정책은 일반 여론의 동향에 좌우되면 안됩니다. 전문가들의 냉철한 분석 및 판단을 토대로 국가지도자가 최종 결정한 뒤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러나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 과정은 이런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봅니다.” 초대 베트남 주재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蔡命新·77·베트남 참전전우회장) 예비역 중장은 19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자택을 찾아간 본보 정치부 한기흥 차장과 윤상호 기자에게 정부의 추가 파병 결정을 지켜보며 느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정부가 갈팡질팡해 국론이 분열됐고 국민도 혼란스러워했습니다. 특히 한미관계는 치명상을 입어 상당히 걱정됩니다.”》

채 장군은 우왕좌왕한 정부의 파병 결정 과정을 격정적으로 질타했지만 사실은 그도 40년 전 베트남에 전투병을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그런 그가 지금 와서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정부 내에서도 이라크 파병을 놓고 이견이 있었습니다. 파병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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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베트남전과 마찬가지로 한미동맹 때문입니다. 특히 북한핵 문제는 결코 우리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미국이 결정적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저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에게 전투병 파병을 반대했습니다. 베트남 공산군을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파병을 결정한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 경제력을 갖고 있었고 제3세계 국가들은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었죠. 김일성은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뿐이고 얻는 것은 통일’이라며 적화야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도발을 못한 것은 주한미군 때문이었는데 우리가 파병을 안 하면 미국이 주한 미 2사단과 7사단을 베트남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선 파병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겁니다.”

―베트남전 파병 당시 박 전 대통령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1965년부터 미 지상군이 베트남에 본격 투입되면서 미측이 추가 파병을 요청해오자 박 전 대통령은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국익을 위해 힘든 결단을 내렸죠. 박 전 대통령은 특히 한국군의 지휘권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는 65년 8월 베트남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에 임명된 뒤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요청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강력히 반대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군이 독자적 지휘권을 갖지 않으면 미국의 용병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저의 반발에 손을 부르르 떨며 당혹스러워했지만 결국 저의 건의를 들어주었고 한국군은 독자적 작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라크에 추가 파병할 한국군에도 해당되는 문제이군요.

“이라크 파병 부대도 책임지역을 맡아 모든 것을 한국군이 관할할 수 있는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적절한 파병 규모는 사단사령부와 2개 연대 6000여명이라고 봅니다.”

―베트남전에선 한국군 5000여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라크 파병장병들의 인명 손실이 발생할 경우 파병에 대한 거센 비판이 예상되는데요.

“베트남전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하러 간 것이지만 이라크 파병은 전후 평화 유지와 질서 회복이 목적입니다. 또 군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라크가 평화롭고 안전하다면 왜 한국 군대가 필요합니까. 장병들의 희생이 걱정됐다면 애당초 파병 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합니다.”

―현재 한미양국은 주한미군을 모두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하는 계획을 추진 중입니다. 이로 인한 안보 공백은 없을까요.

“이미 외신에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대미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한국이 추가 파병을 끝내 꺼린다면 주한미군을 당장 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죠. 만약 파병을 거부했다면 한미동맹은 결정타를 맞았을 겁니다. 주한미군 재배치는 실로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주한미군이 한강 이남으로 빠진다면 수도권 사수에 큰 공백이 불가피합니다.”

―노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어떻게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것인지 대통령께 직접 여쭤보세요. 세계 어떤 국가도 나 홀로 ‘자주국방’을 하는 사례는 없습니다. 미국도 상대가 안 되는 이라크군과 싸우면서 많은 동맹국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대북 감시정보의 대부분을 미군의 첨단 고가장비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자주국방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한미동맹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채 장군은 “이라크 파병을 통해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손상된 한미관계를 회복하고 대통령이 대국민 설득에 적극 나서 국론 분열을 수습해야 한다”며 “파병 장병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해 중동지역에서 한국의 위상을 크게 제고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채 장군의 서재를 나서는 순간 박 전 대통령이 채 장군을 위해 써준 ‘국위선양(國威宣揚)’이라는 휘호가 눈에 띄었다. 어렵게 내려진 이라크 파병 결정이 어쨌든 국익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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