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연좌제는 냉전의 그늘이 드리워진 한국의 그것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개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1994년 일본의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연좌제가 강화됐다. 후보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법원은 해당 후보자의 당선을 취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본인이 위법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일본 동북부의 센다이(仙臺) 검찰은 최근 제1야당인 민주당의 두 의원에게 연좌제를 적용해 기소키로 했다. 이들을 지지하는 노조 간부들이 통신회사에 의뢰해 불법 전화 선거운동을 벌인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
집권 자민당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수도권의 사이타마(埼玉)현에서 당선된 자민당 소속 아라이 마사노리(新井正則) 의원이 운동원들에게 현금을 준 혐의로 체포됐다. 중앙당에서 받은 돈 중 500만엔(약 5000만원)을 선거사무장에게 건넸고, 이 가운데 180만엔이 운동원 동원에 쓰였다.
어찌 보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흔히 생겨날 만한 일로도 여겨지지만 일본 사회는 성토 일색이다. 아사히신문은 “국민의 세금인 정당교부금을 불법운동에 쓴 것은 죄질이 나쁘다”며 “21세기에도 이런 범죄가 남아 있다니…”라고 개탄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현역 의원 4명이 선거법 위반이 드러나 의원직을 그만뒀거나 사퇴할 처지에 몰려 있다.
과거 금권정치로 악명이 높았던 일본이지만 정치자금 부정에 관해서는 액수를 불문하고 엄격히 따진다. 월드컵축구대회의 공동 개최국이자 활력이 넘치는 이웃나라 한국의 대통령이 선거자금 추문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0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자신이 부정자금 의혹에 관여한 것이 확인됐다”며 한국의 정국 혼란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거취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또 최고통치자를 뽑는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사 결과 잘못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면, 액수의 다과에 관계없이 최소한 ‘사죄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의 경제력이 일본보다 못한 현실은 인정한다 해도 정치적 도덕성까지 뒤진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
박원재 도쿄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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