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노랑과 갈색의 장막은 다섯 곳을 접어 올려, 두 가닥씩 넓은 끈을 늘어뜨려 놓은 모습이다. 차일은 위로 팽팽히 부풀어 있고 주름선은 굵다. 집안에 설치한 가설 장막이다.
○ 각저총 ‘대장군 전별도’ 상류생활 그려
이 그림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의 5세기 벽화고분인 각저총(혹은 씨름무덤) 가운데 한 장면이다. 앞 칸을 지나 안 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나는 후벽의 벽화이다.
큰 커튼 안쪽에 무대 중앙으로 주인공인 한 남성이 긴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오른편으로 평상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여인이 보인다. 이들 좌우에는 소년 시종과 소녀 시녀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장막 밖 왼편에는 호위부관인 듯한 남자가 막 걸음을 떼는 자세이고 오른편에는 상을 든 시녀가 무대로 올라선다.
두 여인 뒤로는 소반에 크기가 다른 그릇이 세 개씩 놓여 있다. 가운데 남성의 왼편으로 세 다리의 소반에 손잡이가 달린 검은색 술병이 놓여 있다.
가랑이를 쫙 벌리고 두 손을 배꼽에 모은 중앙의 남자가 묘 주인이다. 네모 점 바둑판무늬의 바지에 붉은색 저고리를 입었는데 흉상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검은 띠의 저고리는 소매통이 좁고 어깨에 검은 가죽을 댄 전투복이다. 또 왼쪽 허리춤에 둥근 고리의 칼을 차고, 뒤쪽 소반에는 활과 화살이 놓여 있다.
왼쪽 벽의 씨름 그림과 함께 묘 주인이 무인(武人) 출신으로 대장군이었음을 암시한다. 벽화의 무대는 대장군이 출정하기 전 가족들과 작별하는 전별도(餞別圖)인 셈이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약간 굽힌 두 여인도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며 안타까워 하는 자세다. 이별의 만찬치고는 검소한 상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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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벽화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여인이다. 묘 주인이 정부인과 첩을 둔, 고구려 상류사회의 일부다처(一夫多妻)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달리했던 당시의 화법(畵法)으로 볼 때 두 부인의 키가 같아서 눈길을 끈다. 집안에서 갖는 정부인과 첩의 위상이 별로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부인은 모두 머리를 땋아서 올려 묶고 삼각형의 흰 수건으로 감싼 모습이다. 정부인은 흰 주름치마에 붉은색 띠의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정숙한 차림새이다.
이에 비해 오른편의 첩은 화려한 편이다. 물방울무늬 두루마기의 붉은색과 검은색 두 줄 띠, 그리고 주름치마 끝단에 두른 이중의 띠 장식이 첩다운 복장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표정은 정부인 쪽이 뚜렷하다. 묘 주인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 있을지 그 얼굴을 살필 수 없어 아쉽다.
○ 처·첩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부인을 셋 둔 경우도 있다. 평남 온천군 화도리의 수렵총(혹은 매산리 사신총이라고도 부름)의 북벽에서 찾을 수 있다. 수렵총은 사냥도를 비롯해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단실(單室) 구조의 벽화고분이다.
북벽에 북두칠성 아래 현무도와 나란히 묘 주인 부부상이 배열되어 있다. 간소하게 그려진 장방 안에 끝이 올라가고 목이 긴 가죽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평상에 올라앉은 네 인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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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 검은색 포를 입고 부처처럼 앉아 있는 이가 묘 주인인 남편이다. 그 오른쪽 장막 밖으로 묘 주인이 타고 온, 앞발을 차고 오르는 말과 고삐를 쥔 마부가 대령해 있다. 묘주인의 왼쪽으로는 세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들의 왼편 장막 밖에는 한 시녀가 대기하고 있다.
묘 주인 바로 옆의 정부인은 독립된 평상에 모셔지고 그 왼편의 두 여인은 한 평상에 나란히 자리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첩들일 것이다. 정부인과 첩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세 여인은 크기가 엇비슷하다. 또 주황색 바탕에 먹점의 물방울무늬가 장식된 두루마기를 똑같이 입고 있다. 앞서 살펴본 각저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신분적 위치가 모두 대등했음을 보여준다.
각저총과 수렵총 외에는 인물풍속도 벽화고분이 대부분 일부일처의 부부 초상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태호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고구려는 일부일처제…일부 상류층만 多妻▼
고구려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 사회였다. 그러면서도 각저총이나 수렵총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 상류층은 후궁이나 첩을 두었던 모양이다. 후사를 잇는 방편으로 용인되었으리라.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왕들은 대체로 한 명의 왕후를 두었다. 물론 문자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28명 가운데 7명을 제외하고는 후궁을 둔 기록이 없다. 신라왕실이 근친혼을 통해 체제를 유지했던 데 비해 고구려왕은 인접 소국(小國)의 왕족이나 귀족층에서 왕비를 간택했다. 정략혼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는 동아시아 제국을 탄탄하게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구려왕 가운데 후궁을 둔 유리왕 대무신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등은 서민층에서 후궁을 구했다. 마음 편한 애첩으로 미색을 구하지 않았을까.
유리왕의 유명한 황조가(黃鳥歌)에 그런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후궁간의 다툼에 져서 궁전을 떠나버린 한족(漢族) 미인 치희(雉姬)를 못 잊어 망연자실 읊은 시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운 이 내 몸은/뉘와 함께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이어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짐이 버거웠을 유리왕이다. 절박한 나랏일 못지않게 한 남정네로서 품은 그리움을 애절하게 노래했다. 이런 서정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찬연한 벽화예술을 창조한 멋쟁이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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