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인문사회]'유목민'…유목민족 새롭게 재조명

  • 입력 2004년 2월 13일 17시 45분


◇유목민(L'homme nomade)/자크 아탈리 지음/파이야르 출판사

1998년 저서인 ‘21세기 사전’에서 미래 문명을 새로운 ‘디지털 유목민’의 시대로 예견한 바 있는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이번엔 유목민의 시각에서 인류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역사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탈리는 최근작 ‘유목민’을 통해 500만년 인류 역사 가운데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은 불과 7000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도 17세기 중반 이후 인류 문명의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인류는 한 지역, 한 국가에 안주하는 정착민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유형의 유목민으로 진화해 가는 중이라고 진단한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이동전화, 휴대용 컴퓨터 및 네트워크의 발달로 ‘실제 공간의 이동’보다는 ‘이동의 개념’ 그 자체가 더 중요하게 됐다는 것, 그래서 정착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가상 세계를 통한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통념과 달리, 정착생활이 주류를 이뤘던 지난 7000여년간의 인류 문명사에서도 오히려 유목 민족이 문명의 탄생과 발달에 기여한 바가 더 크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와 걷고 뛰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줄곧 ‘방랑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말을 길들이고 바퀴를 만들어내고 바다에 배를 띄우고 땅에 기차와 자동차를 굴려가며 인류는 계속 자신들의 활동 공간을 늘려가려고 애를 썼다. 이 과정에서 유목 인류는 불을 발견하고 언어, 종교, 민주주의, 시장, 예술 등 모든 문명의 실마리가 되는 품목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반면 정착생활을 통해 인류가 만들어낸 것이란 고작 국가와 세금뿐이라고 일침을 놓으며, 저자는 ‘문명의 파괴자’로 늘 폄훼의 대상이 돼 왔던 유목 민족들을 단숨에 인류 문명사의 전면에 복권시킨다.

사실 인류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정착 민족들은 어느 곳에선가 떠돌다 들어온 유목 민족의 후손들이 아닌가. 유목 인류를 중심으로 인류사를 다시 쓰고 있는 이 책은 어느 민족 못지않은 유목의 역사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한민족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직접 한민족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 내부 깊숙이 잠재해 있는 ‘유목 인류의 본성’이 드러났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세계 곳곳을 향한 한민족의 방랑은 시작됐다. 전 세계로 흩어져 해외에 삶의 둥지를 튼 한인들의 수가 무려 700만명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한민족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네트워크만 제대로 구축된다면 신유목민 시대를 맞는 우리의 앞길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임준서 프랑스 루앙대 객원교수 joonseo@worldonlin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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