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달리의 고향 스페인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가다

  • 입력 2004년 2월 16일 18시 32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두 시간을 달리면 ‘피게레스’라는 작은 기차역에 도착한다. 스페인의 전형적인 농촌 소읍인 이 곳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가 태어나고 묻힌 곳. 요즘 이 곳은 ‘달리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보려고 몰려드는 외국 관광객들로 때 아니게 북적거렸다.

9일 오전 역에서 내려 10여분을 걸으니 대로변에 바깥벽을 온통 빨갛게 칠한 건물이 서있다. ‘달리 시어터-미술관’. 1974년 달리가 직접 세운 미술관이다.

달리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한 ‘달리 시어터-미술관’은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을 연 개척자가 세운 건물답게 겉보기부터 다르다. 지붕에는 달리 자신의 그림에 상징물로 즐겨 그렸던 흰 달걀을 세워 놓은 거대한 설치작품이 얹혀 있다. 입구에 검정색 캐딜락 위의 얼굴 없는 나신상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미술관 앞에 ‘시어터’라는 제목을 왜 붙였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인의 누드 일부를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그린 달리 작품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어 건 미술관 2층 입구. 피게레스=허문명기자

1월9일 시작해 9월26일까지 열리는 ‘달리 회고전’에는 기존 소장품을 포함해 100여점의 유화작품과 400여점의 드로잉, 50여 점의 설치작들이 선보인다. 나선형으로 설계된 박물관의 둥근 벽을 따라 1917∼18년의 초기작품, 초현실주의 화풍이 무르익은 1919∼1940년대 작품, 그리고 1941∼1970년대 후기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몇 개의 선만으로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한 드로잉 작품에 이어 10대에 그렸다는 ‘바느질하고 있는 안나 할머니’ 등 초기 유화들은 초현실주의 화가로만 알려져 있는 달리 역시 젊은 시절에는 전통주의적 화법에 몰두한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달리 미술관은 그의 화풍처럼 놀이공원에 마련된 마법의 방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에 구멍을 뚫어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보게 한다든지, 아예 사방 벽을 까맣게 칠해 놓고 그림에만 조명이 비춰지도록 연출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압권은 그의 아내이자 평생 동반자였던 갈라를 소재로 한 그림들만 모아 놓은 ‘갈라의 방’.

1층 입구에선 캐딜락 위 여인의 나신 조각이 분수대 물을 맞으며 서 있는 달리 설치작품이 관객들을 맞는다. 피게레스=허문명기자

갈라의 앞, 뒤, 정면을 다양하게 묘사한 그림들은 단아한 매무새에 한쪽 가슴만 드러낸 모습 등을 통해 모델이 품은 지성미와 야성미를 절묘하게 표현해낸다. 옷을 벗고 뒤로 앉은 갈라의 어깨선에서는 강하면서도 외로운 자의식을 가진 한 여성의 내면이 드러난다.

달리의 팬이어서 일부러 휴가까지 내서 왔다는 영국인 윌리암 트레이(34·웹디자이너)는 “에로틱한 입술 소파를 비롯해 코에 귀가 붙어있는 비너스 두상, 백조 모양의 욕조 등이 진정한 아방가르드였던 달리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 준다”고 말했다.

흐늘거리는 시계, 인간들을 신체 부위별로 해체하고 조합한 다양한 데생, 새 다리를 한 코끼리 등 그의 그림들을 보고나면 광기와 무의식이 주는 긴장과 함께 이토록 세상을 제멋대로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배짱 앞에 유머와 여유가 함께 느껴진다.

마드리드 꼼쁠루뗀쎄(Complutense) 대학의 마리아노 데 블라스 교수(45·서양화)는 “달리의 작품들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야만과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대리 만족적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시간이 지날수록 애호가 층이 두터워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붉은 색 건물 위에 달리가 즐겨 그린 계란 모양의 설치물이 놓여 있는 미술관 전경. 피게레스=허문명기자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듯 달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스페인 외에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미국 필라델피아, 독일 쾰른 등 전 세계에서 계속 이어진다. 미국 플로리다 주는 주정부가 앞장 서 ‘2004 달리의 해’ 행사를 지원하고 있으며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달리 미술관에서는 ‘달리 아메리칸 컬렉션’전을 9월까지 개최한다. 베네치아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달리 회고전이 9월 개막되며, 우리나라에서도 6∼9월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달리가 디자인한 가구와 의상, 보석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린다.

“늘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인간의 맹목적 습성을 공격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던 생전의 달리. 광기와 불안과 공포, 신경쇠약 같은 내면의 무의식을 회화, 조각, 설치, 영상에까지 다양하게 펼쳤던 전방위 예술가는 이제 진정한 자유를 구가했던 전위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피게레스(스페인)=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