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티드의 인생 유전=뉴욕타임스는 "아이티 빈민가에서 민주주의를 역설하며 대통령에 올랐으나, 권력을 잡은 뒤에는 자신이 주장해온 바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인물"이라고 아리스티드를 평가했다.
아리스티드는 1990년 12월 아이티 역사상 첫 민선 대통령에 당선됐다.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해방신학파 신부'에게 시민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 1953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뒤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빈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독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해온 그는 80년대 몇 차례 암살 위기를 넘기면서 '민중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1988년 교계의 배척을 받은 그는 1994년 공식적으로 사제직을 버렸고, 이후 결혼도 했다.
아리스티드는 1991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7개월만에 군부 쿠데타로 축출돼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4년 다국적군이 군정을 몰아내면서 대통령직에 복귀해 임기를 마쳤다.
연임을 금지한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던 아리스티드는 2000년 재출마해 다시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야권은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라발라스 가족 당이 부정선거를 했다며 총선 재실시를 주장해왔다.
한때 빈민의 영웅이었던 그는 첫 번째 재임기간에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임기에서 아리스티드는 선거 부정과 정치적 부패, 아이티를 중남미 국가 중 가장 가난한 나라로 만든 경제적 실정으로 국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결국 29일 그는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아리스티드는 국외 탈출 이후 1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한 것으로 보도됐으며,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은 어수선한 아이티=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 등의 다국적군이 29일 이후 속속 아이티에 도착해 치안 유지에 들어갔다. 미국은 200여명의 해병대를 아이티에 파병했으며 프랑스는 모두 300여명을 아이티로 보낼 계획이다. 다국적군에는 20~30명의 캐나다 특공대도 포함돼 있다.
이에 앞서 미국과 프랑스의 요청으로 열린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이사국들은 '평화 유지군' 파병을 승인했다. 카리브공동체(CARICOM) 회원국 정상들은 2일 자메이카에서 회담을 갖고 향후 아이티의 안정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출국한 직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거리에서는 약탈이 이어지고, 주유소 방화가 발생하는 등 사실상의 무정부 사태가 지속됐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무장한 채 대통령 궁에 모였으며, 곧 수도로 진격할 예정인 반군과의 충돌도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반군 지도자인 기 필립 전(前) 경찰청장은 수도 입성 이후에는 더 이상 전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5일 무장 봉기가 시작된 이후 유혈 사태의 사망자는 1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티에서는 헌법에 따라 보니파스 알렉상드르 대법원장이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뒤를 이어 새 행정 수반이 됐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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