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테러전쟁 명분을 ‘민주주의 확산’으로 천명했지만 정작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와 반대로 전제주의적 지도자로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대테러전쟁 때문에 독재정권을 옹호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셈이다.
미국은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지원이 알카에다 조직을 완전 분쇄하는 ‘잭폿’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단기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알카에다 지도자급 요원을 비롯한 테러리스트 500여명을 체포한 것.
문제는 파키스탄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지나친 친미에 대해 반감을 가진 파키스탄 국내의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자 무샤라프 대통령은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총리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11일 “파키스탄 국민 대부분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나타났을 때 ‘구세주’라며 환영했지만 이제는 강력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독재자의 하나로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1947년 인도와 분리된 뒤 득세했던 군부독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
더구나 무샤라프 대통령은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정당 원리주의자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미국에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알카에다와 탈레반 전사들의 학교인 ‘마드라샤’를 단속해 테러를 차단하겠다던 약속도 흐지부지되고 있다.
미국은 옛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했다가 오히려 더 조직적인 테러집단인 알카에다를 만들어낸 ‘전철’을 되밟을 가능성도 있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테러 응징이라는 명분에만 매달릴 경우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해 제동을 걸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매년 파키스탄에 3000만달러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최근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핵기술을 암시장에 유출한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사면한 것도 군부를 보호하려는 뜻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기술 이전을 크게 문제 삼지 않은 것은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배려’는 결국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부추기는 부정적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은 최근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샤힌-2’를 실험한 데 이어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고 파키스탄의 한 고위 과학자가 10일 밝혔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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