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3월 셋째주

  • 입력 2004년 3월 14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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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할 지역 대표를 가리는 극동 예선이 1954년 3월 일본 도쿄의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펼쳐졌다. 광복 이후 최초의 한일 축구전이기도 한 이번 경기에서 한국팀은 1승 1무로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사진제공 대한축구협회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할 지역 대표를 가리는 극동 예선이 1954년 3월 일본 도쿄의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펼쳐졌다. 광복 이후 최초의 한일 축구전이기도 한 이번 경기에서 한국팀은 1승 1무로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다. -사진제공 대한축구협회
▼解放 後 처음의 歡喜-韓日蹴球 快勝에 눈물의 在日僑胞▼

14일 일본 동경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세계축구선수권대회 극동예선-한일축구 제2회전에서 한국팀은 2 대 2 동점 무승부로 끝마쳤으나 지난 7일의 제1회전에서 승리한 관계로 결국 1 대 0으로 일본군을 압도하고 세계축구선수권대회 아세아 대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됐다.

이날 경기장에 운집했던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거주한 이래 최초요 최대의 감격과 기쁨에 잠겨 어찌할 줄을 몰랐다. 특히 이날 운동장에는 일본축구 사상 그 유례를 보지 못한 3만명이라는 관중이 운집해 응원단의 성원과 노랫소리로 흥분의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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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한국 해군 3백명이 흰 모자를 열광적으로 흔들면서 이채로운 응원을 보내 일본 응원단을 무색하게 했다.

<1954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에서>

▼첫 축구 한일전… 승전보에 온나라 ‘들썩’▼

일본과의 경기에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국민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일제 식민통치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1954년 당시 ‘적진(敵陣)’에서의 승리 소식은 한국인들을 더 흥분시켰을 것이다.

재일교포들은 “일본에 거주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이라며 손에 손을 잡고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기사에 등장한 ‘세계축구선수권대회’는 같은 해 6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 월드컵이다. 한국은 첫 출전한 이 월드컵 본선에서 첫 번째 상대인 헝가리에 0 대 9로 참패했지만, 예선전은 기분 좋게 출발했던 것.

광복 이후 최초의 한일 축구경기이자, 월드컵 본선 출전권이 걸렸던 당시의 도쿄(東京) 대전은 어렵게 성사된 경기였다. 경기는 ‘홈 앤드 어웨이’로 도쿄와 서울에서 각각 한번씩 해야 했으나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선수의 방한을 막는 바람에 일본에서만 두 번 열렸다.

이 전 대통령은 한국 대표팀이 일본에 가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재일 대한체육회 신희(辛熙) 회장과 재일사업가 정건영(鄭建永)씨 등이 나서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한국팀의 이유형 감독은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방일을 허락받는 자리에서 “만약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던 한국과 일본은 48년 뒤인 2002년 공동주최국이 돼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축구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하지만 한일간의 민족감정까지 화합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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