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한국국제협력단 최고령 봉사단원 양병택씨

  • 입력 2004년 3월 16일 19시 17분


“옛 시절의 화려함만 떠올렸다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었겠죠.”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작은 공업도시 마콜라 사프가스칸다. 이곳에서 매일 아침 태극기를 게양하는 한 한국인이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봉사단원인 양병택(楊炳澤·63)씨. 지금까지 KOICA가 외국에 보낸 봉사단원 가운데 최고령자다.

양씨가 스리랑카에 간 것은 2002년 11월. 한-스리랑카 국제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지어준 한스기술직업훈련원에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어요. 무더운 날씨뿐 아니라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는 ‘예’ ‘아니요’를 구분하는 것부터 헷갈렸다. 컴퓨터에 대한 기초개념을 열심히 설명한 뒤 이해하겠느냐고 묻자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드는 학생들의 반응에 설명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긍정을 뜻하는 몸동작이었다.

건기(乾期)에 속하는 3월 날씨가 섭씨 30도를 웃도는 나라 스리랑카. KOICA가 봉사단원을 보내는 국가 중에서도 오지(奧地)에 속하는 데다 말라리아 콜레라 등 풍토병 때문에 젊은이들도 선뜻 나서지 않는 곳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양씨는 왜 이곳에 왔을까.

“살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 고마웠죠. 어떻게든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한국전력에서 30여년간 일한 양씨는 98년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이 진행되자 ‘후배 직원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명예퇴직했다.

“서울 청량리에 다일천사병원을 짓는다는 신문기사를 봤어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이었는데 건축비가 모자란다는 내용이었죠.”

그는 ‘천사회원’이라는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는 아내 정정희(鄭貞熙·60)씨와 두 아들, 큰며느리도 천사회원으로 끌어들였다. 양씨 등 수많은 천사회원의 후원에 힘입어 다일병원은 2002년 초 준공됐다. 양씨는 후원에 그치지 않고 직접 병원에서 봉사를 하겠다며 2002년 2월부터 봉사자 교육을 받았다.

“그해 4월이었던 것 같아요. 스리랑카에서 컴퓨터 교육을 담당할 봉사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봤죠.”

자식들은 아버지가 ‘늦바람’이 났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KOICA 스리랑카 소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이 들었다고 떨어뜨리지 말고 기회를 달라”며 남편을 후원했다. 그녀는 이미 삼성서울병원이 개원한 94년부터 어린이병동 소아학습실에서 백혈병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해오고 있었다.

“가장이 직장을 잃었을 때는 조금 막막했어요.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못해본 일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요즘은 토요일마다 ‘전화 데이트’를 해요. 매번 비슷한 말이 오고가죠. 남편은 ‘건강하게 잘 있다’며 집 사정을 묻고 저는 ‘집 걱정은 하지 말라’며 건강하라고 당부하죠.”(아내 정씨)

지금까지 양씨가 배출한 학생은 40여명. 현지 고등학생과 전문대생, 취업준비생 등이다. 가장 어려운 점은 열악한 교육여건. 훈련원의 컴퓨터는 96년 설립 당시 들여온 486급이다. 별다른 교재도 없다. 강의 내용을 적은 노트가 고작이다.

“올해 1월 졸업한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설문 문항에 ‘왜 사는가’를 끼워 넣었죠. 예상치 못했는데 ‘부모에게 공경하고 나라에 헌신하기 위해’라는 대답이 무척 많았어요. 또래의 한국 젊은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해지더군요.”

양씨는 11월 한국에 돌아온다. 귀국 뒤에는 다일병원에서 노숙자와 빈민을 돕는 호스피스로 일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건방진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자세라면 퇴직 이후의 삶도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지완기자 cha@donga.com


스리랑카에서 한국국제협력단의 봉사단원으로 활동하는 양병택씨(왼쪽). 그는 협력단이 1991년 해외로 봉사단원을 내보낸 이래 최고령자다. 사진제공 한국국제협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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