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모두 13개의 연방 항소법원(우리나라의 고등법원)이 있는데, 제9연방 항소법원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미국 서부와 북부 9개주를 관할하는 가장 큰 항소법원이다.
미국 연방법원 공보(公報)나 ‘뉴욕 로이어’ 등의 법률관련 매체는 물론 ‘메트로폴리탄 뉴스’ 등 언론들도 최 판사의 부음 소식과 함께 그의 생애와 업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언론들은 그를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상에 오른 법조계의 아시아계 선구자’라고 칭송했다.
최 판사는 1916년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까지 하루 12.5센트의 임금을 받으며 파인애플 가공공장에서 일했다. 그 후 양복점 재단사로 전직한 아버지의 후원으로 공부를 시작해 하와이대를 거쳐 1941년 하버드대 법과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후 미국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법과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그는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며 한국계로 변호사가 된 것도 그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졸업 후 군법무관과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1957년부터 2년간 하와이 검찰총장을 지냈으며 1971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당시까지 이민 역사가 훨씬 앞선 중국이나 일본도 연방법원 판사를 배출하지 못했다.
최 판사는 1984년 소수의 판사들에게만 주어지는 ‘시니어 판사’의 지위를 얻었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33년간 판사의 외길을 걸어 왔다.
한때 법원 서기로 최 판사 밑에서 일했던 리처드 클리프턴 판사는 “최 판사는 피고인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존경했으며, 그로 인해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다.
최 판사는 작고한 부친의 빛바랜 재단사 자격증을 판사임명장과 함께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뒀는데, 사무실을 찾는 손님들에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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