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대선이 있는지라 여당연합에서도 차기 후보군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 다 여성 정치인이다. 국방장관 미첼레 바첼레트와 외무장관 솔레다드 알베아르다. 민간 여성 국방장관은 군부의 입김이 센 이 나라에서 변화된 민-군 관계를 잘 보여준다. 여당 내부는 바첼레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한다. 야당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석패한 리카르도 라빈으로 현재 인기가 높은 산티아고 시장이다. 정말 칠레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관심이 쏠린다.
▼이념 껍질깨고 세계화 현실 수용 ▼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라고 위정자와 국민이 한국에 거는 기대도 크다. 한국은 이제 칠레의 대아시아 창구가 됐다.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은 10월 산티아고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칠레를 ‘태평양 국가’로 자리매김할 제2의 개국 기회라고 기염을 토한다. 수출이 크게 늘 것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쪽 투자도 유치했으면 한다. 한-칠레 친선협회 간사인 라반데로 상원의원은 ‘90%는 한국이 가져가고 10%를 칠레가 먹는’ 자유무역협정이 왜 그렇게 진통을 겪었는지 모르겠다고 투정한다. 그러면서 “환경오염 부산물이 많은 구리제련업체를 칠레로 보내면 어떻겠느냐”면서 투자 결정 능력이 전혀 없는 나에게까지 로비를 한다. 아! 칠레 정치인들은 투자 유치에도 열심이구나.
한때 좌우가 격렬하게 충돌해 1973년 쿠데타까지 일어났던 칠레였다. 1989년을 기점으로 민주화된 지 15년간 반독재 민주화 세력이 계속 집권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큰 어려움 없이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좌우 모두 선거정치에서 중도를 지향하는 정책을 쓰기 때문에 과거 청산이나 복지 노동 정책을 제외하곤 이념적 편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3차례나 대통령을 낸 중도좌파 세력은 피노체트 시절 개방경제의 공과를 수용했고 급진적인 과거 청산을 보류했다. 그들은 세계화된 현실 속에서 실용주의 성장 노선밖에 길이 없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챘던 것이다. 좌익의 담론이 세계화와 경쟁력의 틀 속에서 형평성을 제고하는 쪽으로 이동한 결과다.
내가 만난 저명한 중도좌파 정치가 중에는 하이메 가스무리 상원의원(사회당)이 있었다. 그는 칠레대학의 운동권 수장으로 마푸(MAPU)란 좌익정당을 이끌던 레닌주의자였다. 그는 1980년대 유럽에 망명했을 때 세계화 속에서 소국에 주어진 선택의 폭을 깨달았고 ‘칠레 좌익의 사회민주주의화’를 이끌어냈다. 그가 구술한 ‘태양과 안개’는 한 칠레 좌익 인사가 세계화의 현실에 적응하는 고뇌에 찬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도좌파도 실용주의 성장노선 ▼
저명한 경제학자 카를로스 오미나미(사회당)를 만난 것도 큰 수확이었다. 프랑스에서 유행한 조절이론의 주요 저자이자 전임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역임했던 그도 세계화된 현실에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사회복지와 교육 정책을 재편하는 것’임을 역설했다. 1980년대 피노체트의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날카롭게 비판한 저서 ‘신보수주의 경제학’을 썼던 알레한드로 폭슬레이(기민당)의 글을 읽은 것도 기쁨이었다. 상원의원으로 상하원 합동예산위원장인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칠레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선 “안정된 고용 조건의 대기업과 공공부문 근로자를 보호하는 유럽형 복지제도를 버리고 아웃사이더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적 안전망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우익 지식인, 정치인들 모두 화두는 세계화 속에서 소국이 살아남을 경쟁력 강화 방안이었다. 폭슬레이 의원은 “아무도 세계화 바깥에서 살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칠레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핀란드의 노키아, 뉴질랜드와 호주의 낙농업을 언급한다. 세상도 바뀌고 사람의 생각도 바뀌는 게 세상의 이치인 모양이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