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일본인들은 엽서와 팩스 등을 통해 “정부가 이라크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다 살해될 처지가 됐으니 자업자득”이라며 가족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인터넷상에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난무해 납치 피해자의 홈페이지가 폐쇄됐다.
일본 언론은 우익 성향의 일본인들이 자위대 철수를 호소하는 가족들의 발언에 불만을 품고 집단행동에 나선 것 같다고 전했다. 일부의 소행이라고는 하지만 인질 가족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지메) 현상은 ‘약자에게 강한’ 일본 사회의 치부(恥部)를 드러낸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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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도하는 폭언, 협박, 비아냥=인질 사태를 계기로 자위대 철수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인질들의 집에는 ‘누가 사지(死地)에 가라고 떼밀었느냐’ ‘스스로 책임을 져라’는 비난 엽서가 쇄도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 납치된 다카도 나호코(高遠菜穗子·34)의 홋카이도 자택에는 ‘3명은 총살될 것이다. 각오하고 출국했을 테니 자업자득’이라는 엽서가 배달됐다.
시민운동가 이마이 노리아키(今井紀明·18) 가족이 원색적인 전화 욕설에 지쳐 자동응답으로 돌려놓은 전화에는 ‘죽어버려’라는 폭언이 녹음돼 있다.
다카도씨의 동생이 TV에서 ‘자위대 철수’ 발언을 하자 ‘까불지 마’라는 협박전화가 여러 통 걸려와 가족들이 잠을 설치기도 했다. 다카도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욕설과 비방이 쏟아져 결국 폐쇄됐다.
집권 자민당 중진인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전 경제산업상까지 “자위대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는 부모가 미성년자 아들을 이라크에 가게 한 것은 뭔가 이상하다”며 ‘가족 때리기’에 가세했다. 산케이신문도 14일자 사설에서 “가족들은 자위대 철수를 요구하며 정부를 비판하지만 1차적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가족들에게 임시사무실을 제공한 홋카이도 도쿄사무소에는 “사용료를 제대로 받았는가” “사무실을 왜 빌려주는가”라고 따지는 전화가 100통 이상 걸려왔다.
▽‘죄송하다’ 머리 조아리는 가족=가족들은 이런 분위기에 질려 13일 기자회견부터는 “여러분에게 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사죄’ 발언을 연발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자위대 철수를 주장했던 다카도씨의 동생은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며 “여러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다카도씨의 부친은 “자식들이 감정적인 발언을 해서 오해를 산 것 같다”며 “면목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마이군의 부친도 “우리는 자위대 파견에 찬성하거나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인명을 존중해 달라는 것뿐”이라며 자세를 낮췄다.
도쿄신문은 “일본 사회가 각자의 생각과 신념을 표명하는데 대한 너그러움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한 정신과 의사는 “일본이 폐쇄시대의 분위기에 갇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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