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내 이름은 빨강’ 작가 ‘오르한 파묵’ 인터뷰

  • 입력 2004년 4월 23일 17시 19분


이스탄불의 집필실 베란다에 선 오르한 파묵. 바로 뒤에 작은 모스크가 있고, 그 아래 ‘골든 혼(황금의 뿔)’만으로 푸른 물이 흐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만의 건너편 오른쪽에 톱카프라는 오스만제국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이스탄불=권기태기자
이스탄불의 집필실 베란다에 선 오르한 파묵. 바로 뒤에 작은 모스크가 있고, 그 아래 ‘골든 혼(황금의 뿔)’만으로 푸른 물이 흐른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만의 건너편 오른쪽에 톱카프라는 오스만제국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이스탄불=권기태기자
《오르한 파묵(52)의 집필실은 언덕 위에 있었다. 베란다 문을 열면 아래로는 작은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보였고, ‘골든 혼’으로 불리는 만(灣)의 푸른 물길이 눈에 들어왔다. 만의 저 건너편으로는 옛 오스만제국의 톱카프 궁전과 블루 모스크가 서 있는 고도(古都)가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난아옮김·민음사)은 1591년의 고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21세기에 16세기를 다룬 소설을 쓰면서 집필실에서 그 배경을 매일 본 작가는 아마 나뿐일 것”이라며 웃었다.》

파묵은 백지에 고도의 윤곽을 금방 그려보였다. “어릴 적 꿈이 화가였다”고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터키의 철도 건설을 도맡아 한 갑부였으며 아버지 역시 건축가였다. 어머니는 오스만제국 귀족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저한테 화가와 건축가의 중간쯤 되는 설계사가 되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스탄불대 건축학과에 들어갔지만 결국 중퇴하고 작가의 길로 가게 되더군요. 저는 아버지의 또 다른 성품을 물려받았던 겁니다. 수천권의 책을 가졌던 아버지는 소설가가 꿈이었습니다. 가끔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사르트르를 만나곤 하셨지요.”

그는 지금까지 10권의 책을 썼지만 1998년에 발표한 ‘내 이름은 빨강’이 가장 성공했다고 말했다. 32개국에서 번역됐으며 현재까지 프랑스어판 20만권, 영어판 20만권 등 70만권 이상이 팔려나갔다. 2002년 프랑스의 ‘최우수 외국문학상’, 2003년 이탈리아의 ‘그린차네 카보우르상’, 같은 해 아일랜드의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을 받았다. 이들 상의 수상자로는 귄터 그라스, 도리스 레싱, 움베르토 에코, 밀란 쿤데라 같은 이들이 있다.

파묵은 “언젠가 작가로서 명운을 걸고 그림을 소설로 다루기로 했다”며 “바로 그 작품이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무엇보다 ‘지적인 재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과 연애소설이라는 두 가지의 정밀한 모형건물을 쌍둥이처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1591년의 이스탄불. 알라의 시각(視覺)을 반영하는 이슬람 전통의 ‘세밀화’가 절대 화풍(畵風)이던 이 도시에 인간중심적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회화 스타일이 스며들어오자 화가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난다. 술탄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베네치아 스타일의 회화집을 만들던 화가들 중 한 사람이 살해되자 회화집 제작 책임관은 12년 동안이나 이스탄불을 떠나있던 자신의 조카 ‘카라’를 진상을 규명할 탐정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제작 책임관마저 살해되자 카라는 자신의 옛 연인이기도 한, 제작 책임관의 딸 세큐레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반드시 잡아내야 할 처지가 된다.

카라는 세큐레의 얼굴이 잊혀질까봐 ‘베네치아 스타일의 그녀 초상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카라의 반대편에 선 이슬람 세밀화의 노대가(老大家)는 장엄한 어둠 속에서 신이 내린 최후의 절대미(美)를 영접하기 위해 황금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는 비장한 용단을 내린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다양한 울림을 갖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세속주의, 세계화와 지방주의, 서구문명과 동양문명, 신과 인간, 진보와 보수 같은 굵직한 테마들을 안고 있다.

파묵은 “소설 속의 술탄은 무랏 3세에 해당한다”며 “그는 그림 수집에 많은 돈을 쓴 데다, 소설에서처럼 이슬람 성력(聖曆) 1000년(1622년)을 앞두고 길이 남을 회화집을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을 쓰려고 취재를 위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은 일이 있습니다. 이슬람 세밀화들을 찾아오는 관람객은 박물관에서 길을 잃은 일본인 정도인 반면 서유럽 미술 전시관에는 발 디딜 틈이 없더군요. 서글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를 슬프게 한 이슬람 세밀화는 ‘내 이름은 빨강’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품 발표 6년째를 맞지만 그의 집필실 책상 옆에는 이 작품과 관련한 캐나다 텔레비전과의 인터뷰, 우크라이나 슬로베니아 영국 미국에서의 스케줄 등이 가득 적혀 있다.

그는 “지난 30년간 오로지 펜으로만 써 왔다”며 “졸필이라 단 한 사람의 편집자만이 내 글을 알아보고 타이핑해 준다”고 말했다.

그 옛날의 세밀화가들이 화폭 위에 열정을 퍼부었던 톱카프 궁전의 화원(畵院)을 아스라이 바라보며 파묵 역시 또 다른 ‘세밀화’를 그려온 것이다.

이스탄불=권기태기자 kkt@donga.com

이슬람 세밀화풍으로 그려진 궁정 풍경(왼쪽). 위쪽 가운데 인물이 술탄이다. 원근법을 적용하지 않는 이 화풍에 따르면 술탄은 멀리 있더라도 화가에 가까이 있는 나무나 신하보다 더 크게 그려야 한다. 신이 내린 지상의 질서와 다르면 안되기 때문이다. 오른쪽은 사실적인 베네치아 화풍으로 그린 18세기 후반 셀림3세 초상화. 동아일보 자료사진

▼‘…빨강’ 소재 이슬람세밀화

오스만제국은 15세기 말 그리스 영토까지 장악해 이탈리아 반도와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당시 오스만제국 궁정화원에서는 페르시아(이란)에서 전범이 확립된 ‘이슬람 세밀화(miniature)’가 정통 화풍이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화폭을 구성하며 평면적, 투시적이고, 그늘진 곳이 없는 게 특징이었다. 이는 ‘알라의 시각(視覺)’을 그림으로 구현한 것으로 일종의 ‘절대성’을 가졌다. 이를 주도한 것은 헤라트파(派)로 불린 화가 집단. 거장 비흐자드(?∼1564)가 정점을 이뤘다.

그러나 비흐자드의 시대에 아드리아해 건너편에서는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서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이 새 화풍을 완성하고 있었다. 원근법을 사용하며 그림자와 그늘을 넣어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이를 ‘베네치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오스만제국의 정치적 지배자인 술탄들은 이 스타일을 더 매혹적인 것으로 봤으며,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에는 차츰 ‘이슬람 세밀화풍’보다 ‘베네치아풍’의 술탄 초상화들이 더 많이 걸리게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이 소설 속에서 헤라트파의 후예들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빨강’의 배경 이스탄불▼

‘내 이름은 빨강’의 시공간 배경은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 사람들에게 “유럽 사람인지 아시아 사람인지”를 물으면 “우리는 유레이시안(Eurasian)”이라고 대답한다. 북쪽의 흑해, 남쪽의 에게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이스탄불을 아시아 쪽과 유럽 쪽으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스탄불은 동서양 제국들이 번갈아가며 수도로 삼았고 두 문명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친 중첩 지점이 됐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4세기 이스탄불을 로마제국 동방령의 수도로 정했으며 이곳 이름은 곧 ‘콘스탄티노플’이 되었다. 4세기 말 동로마가 서로마와 갈라진 후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동로마제국) 문명의 중심지로 빛을 발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돌궐족(투르크족)이 수천년에 걸쳐 현재의 터키쪽으로 진출하면서 오스만제국을 이루었고 15세기 중엽 비잔틴제국을 정복했다. 이들은 비잔틴 성당들을 이슬람식 모스크로 탈바꿈시켰으며 동로마의 궁전을 부수고 톱카프 궁전을 세웠다.

이스탄불 현지의 김주찬 박사(정치학)는 “오스만제국 최전성기는 16세기 중엽 술레이만 대제(1520∼1566) 때였다”며 “‘내 이름은 빨강’은 이 정점이 막 지난 뒤 경제가 어려워지고 군부와 민심의 반란이 서서히 일어나던 시기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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