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국제 정치경제학]<中>美 ‘이라크戰 부메랑’에 흔들

  • 입력 2004년 5월 7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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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전문가인 마이클 이코노미데스와 로널드 올리그니는 함께 저술한 책 ‘컬러 오브 오일’에서 “석유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세계의 지배권 그 자체다. 석유를 지배하는 국가는 국제적 패권을 쥘 수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국가 차원에서 석유문제를 다뤄왔다. 미국은 오일쇼크 이후 세계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려면 석유시장이 안정돼야 한다는 점을 더욱 절감했다. 석유 소비국들은 미국 주도의 국제 에너지 질서 아래서 20년을 보냈다. 이 기간에 상대적으로 빠르게 경제가 성장한 한국은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다.

9·11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정부는 대 테러전을 정책의 최우선순위로 정했다. 부시 정부의 대 테러전략은 산유국인 중동지역을 타깃으로 하고 있어 미국의 장기적인 석유정책과 깊숙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 테러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서 중동 정세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덩달아 석유시장도 흔들리고 있다.

석유산업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부시 정부가 국제 에너지 질서를 흔드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미국의 전통적인 석유정책=미 스탠퍼드대 스티븐 크레스너 교수(국제정치학)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일관된 석유정책을 유지해왔다”고 설명한다.

미국 석유정책의 기본 기조는 석유 공급망의 안전 확보, 적정한 석유 가격의 유지, 석유수입대상국의 다원화, 대외정책 수단으로서의 석유 이용 등 네 가지라는 것.

당시 국제정세와 함께 집권 정당이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에 따라 역점 사항이 달랐지만 미국은 기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오일쇼크 때 취임한 지미 카터 정부는 “중동은 세계경제 안정의 사활을 결정하는 지역이며 다른 국가의 중동 지배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카터 독트린을 발표하고 중동지역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미국의 석유정책에 ‘석유의 탈(脫) 정치화’라는 원칙을 추가했다. 석유의 개발과 공급, 수요 등 석유산업에 정치적인 요소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는 것.

석유의 공급과 가격이 경제논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한국이나 일본처럼 해외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석유소비국에는 에너지 안보의 위험이 줄어든다. 반면 산유국들은 이를 대형 석유자본을 앞세운 미국의 영향력 확대로 받아들인다.

냉전체제이던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저유가를 유지했다. 러시아는 당시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석유산업 비중이 60%나 됐고 석유가 거의 유일한 외화 공급원이었다. 미국의 저유가 정책은 러시아가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석유 전문가가 포진한 부시 정부의 등장=부시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석유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많다.

부시 대통령은 30대때 텍사스주에서 유전거래 사업을 한 적이 있다. 딕 체니 부통령도 석유 관련 엔지니어링회사인 핼리버튼 경영진으로 일했다.

또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행정부에 입성하기 전 미국의 대외정책과 에너지 정책과의 관계를 공동 연구한 적이 있다.

이들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은 2000년 ‘국제경제와 미국의 이익’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는 이들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1990년 걸프전 때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어야 했고 이라크 내 반(反)후세인 세력이 많아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는 곧 안정될 수 있다, 석유수입대상국의 다원화도 중요하지만 중동지역은 여전히 중요하다, 에너지 안보는 유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량국가들의 오일달러를 통한 대량살상무기 확보 여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특히 2001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軸) 발언 이전에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 에너지 안보의 걸림돌로 지목돼 있다. 또 중앙아시아보다 유전 개발의 원가가 낮아 이윤이 높은 중동지역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미국 석유기업의 열망도 담겨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미국=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석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대 테러와 석유 질서의 안정 등 다목적 성격이 짙다. 후세인만 제거하면 이라크에 친(親)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중동정세가 안정될 것이라고 미국이 판단했다면 이 계산은 일단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에 과도정부가 수립돼도 미국의 의도대로 석유정책을 펼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포로 학대사건도 큰 변수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백근욱 연구위원은 “이라크전은 중동에 내재해 있던 온갖 문제들이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됐다”며 “부시 정부는 전쟁 후의 시나리오에 대한 충분한 검토 작업 없이 이라크라는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도 애매한 상태다.

미국과 사우디는 1990년 걸프전 이후 ‘안보’와 ‘석유 값 안정’이라는 묵시적 거래를 하며 친밀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은 사우디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바꾸고 있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사우디는 테러범의 온상이고 자금줄이다. 완고한 왕정 유지와 왕실의 사치 등으로 사우디 국민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사우디 왕실로서는 미국 내 일부에서 거론되는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미국이 사우디 왕정에 지나치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다.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부시 정부에 고유가가 지속되는 것은 부담이기 때문이다.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홍순남 교수(중동정치)는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가 혼란에 빠지면 석유산업 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다”며 “미국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도 없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美 "제2 中東을 확보하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석유기업 경영진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카스피 해 인근 유전의 파이프라인을 러시아가 아닌 터키 쪽으로 건설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당시 사할린 유전에서 많은 수익을 기대하던 상당수 석유기업은 러시아 정부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행 파이프라인을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기업에 대한 최소 개입이라는 원칙을 깨고 직접 나선 것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였다.

미국은 중동 석유시장의 교란으로 미국 경제가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제2의 중동’을 찾아왔다. 현재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카스피해와 서부아프리카.

미국이 가장 주목하는 카스피해에는 석유가 최대 2000억배럴이 묻혀 있을 것으로 미 에너지부는 추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매장량이 2618억배럴임을 감안하면 카스피해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딕 체니 부통령은 “역사에서 카스피해만큼 하루아침에 전략적으로 중요해진 지역이 없다”고 말했다.

카스피해는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이란 등 5개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러시아는 구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의 유전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송유관이 모두 러시아를 통과하도록 했다.

그러나 미국은 카스피해는 물론 인접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간전쟁을 계기로 그루지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카스피해 인접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

카스피해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두 나라는 더 큰 차원의 국제 에너지 질서와 관련해서는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개발을 위해 자국의 유전 개발에 서구의 석유 메이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러시아가 과거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석유 가격 조정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이미 석유 수입량의 15%를 아프리카에서 조달하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와 경제적 파트너십 관계 구축은 물론 미국-아프리카 에너지장관 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새로 발견된 대규모 유전지대 주변에는 미국의 군사기지가 들어서고 있다.

서아프리카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에는 미국 수출입은행이 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미국과 아프리카의 에너지 협력관계는 돈독해지고 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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