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19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한 언더우드 가문의 4세 원한광(元漢光·미국명 H H Underwood·61·연세대 재단이사) 한미교육위원단(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 단장은 이렇게 떠나가는 소회를 밝혔다.
원 단장은 119년 전 한국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미국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1세(한국명 원두우)의 증손자. 3월 연세대 교수직에서 물러난 그는 7월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직도 그만두고 11월 중 미국으로 향한다. 그의 부인 낸시 언더우드(한국명 원은혜)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도 6월 말이면 학교를 그만둔다.
이날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위원단 집무실에서 원 단장을 만났다.
―한국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이미 밝힌 대로 이제 한국의 대학이나 교회에서 ‘언더우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만큼 한국이 발전했고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래전부터 환갑이 되면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은 아버지(고 원일한·元一漢 박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1943년에 태어나 세살 때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미국에서 수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의 절반 이상인 35년가량을 한국에서 보냈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한국어는 ‘징그러울 정도’로 유창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성미가 급한 것도 한국인을 닮아서 그렇다고 농담을 건넨다.
―아버지인 원일한 박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버지의 일생은 일종의 ‘완전한 삶(complete life)’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잠들 때까지 아버지는 일생을 한국을 위해 바쳤지요. 어떻게 보면 아버지는 대단한 복을 타고 나셨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살면서 봉사할 수 있었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시던 한국에 묻혔으니까요.”
원 단장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올 1월 타계한 아버지 원일한 박사의 영향이 지대했다. 원 박사의 어록 중 대표적인 것은 “내 비록 미국인이지만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
원 박사는 그동안 한국에 봉사한 것에 비해 너무나 작은 보답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연세대가 재단이사를 맡은 그에게 낡은 소형 승용차를 제공해준 데 대해서도 항상 부담스러워했다는 것. 더욱이 원 박사의 옷은 항상 수선한 자국투성이였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과 미국의 예선경기에서 안정환 선수가 골을 넣은 뒤 안톤 오노의 오버 액션을 흉내 낸 골 세리머니를 하자 이를 TV를 통해 지켜보던 원 박사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때문에 원 박사는 앞선 문화를 베풀어주는 ‘시혜자’가 아니라 한국인과 함께 발전한 ‘동반자’로 기억되고 있다.
―할아버지(고 원한경·元漢慶 박사)에 관해 기억나는 일은….
“할아버지는 내가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별다른 기억이 없지만 항상 나의 독립심을 키워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본인의 뜻과는 달리 선대 때문에 한국에서 이렇게 보내게 된 삶을 후회하거나 원망한 적은 없습니까.
“열다섯살 때쯤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올린 것이 기억납니다. ‘하느님, 제가 보통 미국 사람과 달리 한국에 살게 된 것을 너무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입니다. 미국은 외국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이 100만명이 넘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태어나 살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건이 많이 터져 변화무쌍하고 다이내믹한 한국 사회가 나와 코드가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4대가 흐르는 동안 한국은 매우 발전했지만 언더우드 가문은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였다는 얘기들을 합니다만….
“4대까지 내려오는 동안 1대는 연세대 설립자, 2대는 교장, 3대는 재단이사, 4대인 나는 그저 한 명의 교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발전하는데 가족은 계속해서 망해 왔다’는 농담도 있습니다. 이는 120년 동안 우리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있는 언더우드만이 연세대의 정신을 이끌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불거진 한미간 갈등에 대해서는….
“한국 사람들의 반미감정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나라에 외국군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스스로 얼마나 자부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나는 한국의 반미감정보다는 미국 내에서 반한감정이 생기지 않을까 더 걱정이 됩니다. 현재 미국인은 한국에 대해 매우 무관심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더욱더 섭섭한 결과가 오지 않을까요. 하지만 한국인이 미국 정부가 아닌 한 사람의 미국인이 어떤 사람인지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반대로 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나라 정부간의 관계는 모르더라도 국민간의 관계만은 좋게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희망이자 풀브라이트의 희망입니다.”
―한국 대학에 조언을 한다면….
“한국의 대학은 다른 나라와 달리 입학만 하면 그 이후엔 너무 쉽게 졸업하도록 돼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교수들의 책임입니다. 이건 학자로서 하는 말인데 대학에 연구할 만한 도서관 하나 제대로 없는 것도 문제지요.”
원 단장은 아직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11월 중 미국 플로리다에 2남2녀의 자녀들과 함께 정착한다. 12월에는 손자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완전히 한국을 뜨는 것은 아니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과의 인연을 끊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7월에 한미교육위원단을 그만두면 울릉도와 설악산, 해인사 등 30여년 동안 가보지 못했던 한국 관광지를 모두 둘러볼 계획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급한 성격을 조금만 고쳐서 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한 발씩 양보하는 전통적인 미덕을 베풀어줬으면 한다”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원 단장이 꼽는 업적▼
원한광 단장은 자신을 포함해 4대에 걸쳐 언더우드 가문이 한국에서 이룬 큰 업적으로 △기독교의 전파 △교육기관 설립 △한국의 국제화 등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선교사로서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가장 큰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전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 신자이고 우리 가문이 설립한 교회를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증조할아버지인 언더우드 1세부터 시작된 선교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1세는 새문안교회를 창립하는 등 기독교 전파자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연희전문학교를 세우면서도 기독교정신을 가장 중요한 설립 원칙으로 세웠고 전교생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켰다.
또 하나는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한국 사학 교육을 주도했다는 것. 특히 이들은 선교 과정에서 한국학의 기초를 다졌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원 단장은 “그동안 우리 가문에서는 기독교 전파와 연세대 설립이 한국에서 이룬 가장 큰 사명이라고 말해 왔으나 ‘한국의 국제화’를 이룩하는 데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고 보면 우리가 해온 선교와 학교 설립의 모든 과정이 국제화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물론 증조할아버지는 ‘국제화’란 단어조차 몰랐을 테지만 당신이 하신 성경 번역도 국제화의 일부”라며 “아버지도 한미 정부간 관계뿐 아니라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를 가깝게 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다”고 평가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원한광 단장 약력▼
1964 미국 해밀턴대 사학과 졸업
1972 미국 뉴욕주립대 영문학 박사
1971∼1973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1973∼1976 미국 타키오대 조교수
1976∼1980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부교수
1980∼1981 미국 프린스턴대 객원연구원
1985∼1986 미국 코넬대 교환교수
1987∼1990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학부장
1990∼1996 연세대 국제교육부장
1996∼1998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원장
1980∼2004.3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1998∼현재 한미교육위원단 단장
2004.3∼현재 연세대 재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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