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의 마음은 벌써 전 세계 휴양지로 향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초중등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서 8월 말까지 이어지는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된 것. 신문마다 여행상품을 파는 광고가 넘치고 여행사마다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세계 관광업계는 초유의 불황에 허덕였다. 이라크전과 중동사태, 테러에 사스 확산까지 악재가 겹치며 관광객이 크게 줄었다. 올해는 고유가로 항공요금까지 크게 올라 관광산업은 더욱 위축될 전망.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남의 집 얘기다. 2002년 2000만명을 넘어선 해외여행자 수는 올해도 10%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석유 가격이 크게 오르며 ‘오일 달러’가 쏟아져 들어와 주머니가 넉넉해졌기 때문이다. 사상 최고의 호황을 맞고 있는 러시아는 올해도 7%대의 경제성장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인 특유의 ‘두둑한 배짱’도 해외여행 붐을 거들고 있다. 3월 이집트 홍해에서 관광객을 실은 에어이집트 소속 여객기가 추락했다. 대형 사고가 터지면 관광객은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되지만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비행기표가 싸졌다”며 다투어 이집트로 향했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는 터키와 이집트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두바이) 등 중동권이다. 이들 국가는 이라크전과 중동사태로 러시아 관광객이 줄어들까 걱정했지만 이는 기우였다. 옛 소련 시절 철의 장막에 갇혀 외국여행이 어려웠던 기억 때문일까? 해외로 나가려는 러시아인의 욕망은 두려움을 앞질렀다.
해외여행 열기는 전통적인 휴가 풍속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돔 오디하(휴양소)’나 교외에 있는 ‘다차(텃밭 딸린 오두막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련 정부는 직장별로 휴양소를 운영했고 다차를 개인에게 나눠줬었다.
이 때문에 휴가 풍습도 사회체제만큼이나 획일적이었다. 휴양소는 흑해 연안이나 카프카스에 있는 얄타와 소치 오데사 등에 몰려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말을 걸 때 “언젠가 여름휴가 때 얄타에서 뵌 것 같은데요”라며 접근하면 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 후 해외여행 열풍이 처음 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러시아인이 주로 찾는 나라는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카리브해 연안과 동남아까지 러시아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이에 따라 러시아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도 필사적이다. 모스크바만 해도 33개국이 관광사무소를 열었다. 각국이 러시아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인 것은 이들이 돈 잘 쓰기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러시아 여행객이 해외에서 쓴 돈은 100억달러로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해외여행 소비국으로 부상했다. 공항의 면세점에는 닥치는 대로 화장품과 양주를 사면서 달러나 유로를 한 움큼씩 꺼내 계산하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서방 여행객들이 작은 물건을 하나 살 때도 꼼꼼히 따지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인들은 ‘통이 크기로’ 유명한데다 신용카드보다는 현금을 선호한다. 생필품이 귀했던 소련 시절, 모처럼 해외로 나갔을 때 뭐든지 닥치는 대로 사와야 했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소비 행태는 합리적인 서구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프랑스 주간지 엑스프레스는 최근 파리의 명품점 중에서 러시아어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며 “이들은 호화 쇼핑을 하면서 ‘나도 유럽인’이라는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비꼬았다.
해외여행에 아직 익숙지 않은 러시아 관광객들이 곳곳에서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집트의 나일강 투어 중 술에 취한 러시아 관광객들이 선상 소동을 벌인 후 러시아인 전용 유람선이 생겼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여권발급을 일시 중단하는 등 해외여행을 자제시키려는 분위기도 있다. 너나없이 해외로 나가는 바람에 국내 관광산업은 존폐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의 상징인 해외여행을 인위적으로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지적이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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