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강화를 위해 수도를 옮긴 러시아 지도자는 레닌이 처음이 아니었다. 원래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였지만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는 신도시를 만들어 수도를 옮겼다. 여기에는 자신의 개혁정책에 저항하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을 억누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신도시 건설에 전 인구의 3분의 1이 동원되고 모스크바를 떠나기 싫어하는 주민은 강제 이주시켰다.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의 페테르부르크는 이렇게 탄생했다. 결국 러시아의 수도는 통치자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오갔던 것이다.
▷그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고향인 페테르부르크로 또다시 수도를 옮길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지난주 수도 기능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방안을 담은 법안이 러시아 하원에 상정됐다. 모스크바 집중현상을 막고 지역간 균형발전을 위해 일부 국가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자는 내용. 드디어 수도 이전이 본격화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표결에서 1명의 의원만이 찬성표를 던져 법안은 싱겁게 부결됐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행정 낭비와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을 들어 반대했다.
▷막강한 푸틴 정권이지만 수도의 위상에 관련된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통치자의 ‘한마디’에 따라 수도가 오락가락했던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수도 이전을 서두르고 있다. 노 대통령이 밝힌 수도 이전의 변(辯)이 “구세력의 뿌리를 떠나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서”라면 레닌이나 표트르 대제의 천도 이유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혹시 러시아 역사에서처럼 우리 수도가 서울과 새로 건설하려는 행정도시 사이를 오가는 운명을 맞지는 않을지….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