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호주를 방문한 일본 황태자 부부가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봅 카 총리(왼쪽)와 마리 바시르 총독의 안내를 받고 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1993년 결혼한 후 해외여행 5번 중 혼자 여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사진제공 아사히신문
피플지 최근호는 일본 황태자비의 처지를 이런 표현으로 동정했다.
직업외교관 출신으로 5개 국어에 능통한 마사코(雅子·41) 황태자비는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반년째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일본 언론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황실 안팎의 압력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전한다. 일본의 ‘황실전범’은 남자만이 천황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나루히토(德仁·44) 황태자는 딸만 하나, 동생인 후미히토(文仁·38) 왕자도 딸 둘을 두고 있다.
마사코비는 외교관 경력을 살려 ‘왕실 외교’에 기여하려는 의욕이 강했지만 ‘조신한 처신’을 요구하는 황실 내부의 견제에 부닥쳐 외국 방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더욱 상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세계 각국의 황태자비(또는 왕자비)들의 근황을 소개하면서 일본 황실도 시대 흐름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남녀 차별 없는 왕위 계승
아에라 조사에 따르면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21개국 가운데 왕위계승에 관한 한 남녀평등 원칙에 충실한 국가가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는 ‘남녀 상관없이 자녀 중 첫째’를 왕위계승 조건으로 정했다. 또 영국 스페인 덴마크 룩셈부르크 모나코 태국 통가는 ‘남자가 우선이지만 여자도 왕위를 이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왕의 슬하에 아들이 있으면 그가 왕위를 계승하되 딸뿐이라면 여왕의 존재도 받아들인다는 것.
왕위계승 권리를 남자로 국한한 나라는 유럽에선 리히텐슈타인이 유일하다. 일본 말레이시아 네팔 브루나이 바레인 요르단 모로코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는 여전히 ‘남성 천하’를 고집하고 있다.
지금 추세라면 유럽에는 머지않아 ‘여왕의 시대’가 도래할 전망이다.
스웨덴의 경우 빅토리아 공주(26)가 ‘첫째 우선’ 원칙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한 살 아래의 남동생 칼 필립 왕자가 있지만 1980년 법이 개정된 덕택에 여왕 등극이 확실해졌다. 부친인 국왕이 법 개정 당시 “아들이 내 후계자가 됐으면 좋겠다. 대다수 국민들도 남자 국왕을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말했지만 여론은 남녀평등을 선택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의 황태자 부부는 첫째 자녀가 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차차기 왕위’는 여성의 차지가 된다는 얘기다.
●해외방문 등 활발한 활동
벨기에의 마칠드 황태자비는 1999년 결혼한 이래 지금까지 23차례 외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 가운데 3차례는 남편을 본국에 둔 채 혼자 나선 단독 방문. 올 2월엔 개발도상국 어린이 지원활동의 일환으로 5일간 아프리카를 찾았다.
노르웨이의 메테 마릿 황태자비도 2002년 11월 미국 워싱턴을 혼자 방문했다. 남편이 영국 런던대에 유학했을 때는 영국의 다른 대학에 등록해 빈곤 국가에 대한 개발원조에 대해 공부한 뒤 귀국 후 노르웨이 정부의 해외지원기관에서 실습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종업원으로 일하다 황태자와 만나 사랑에 빠진 뒤 1년간 오슬로 시내의 아파트에서 동거한 경력이 있다. 결혼 당시 이미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지금도 4개월 된 딸과 함께 4명이 산다. 물론 왕위 계승권은 황태자 부부의 소생인 딸에게 있다.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주목받는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는 지난해 4월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의 독자투고란에 글을 보내 이라크전쟁으로 가족과 양쪽 팔을 잃은 알리 소년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청바지 차림으로 테러반대 데모에도 참가해 미국의 타임지가 뽑은 ‘2004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히기도 했다.
유럽의 왕족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시내 번화가에서 외식이나 쇼핑 등 일상생활을 즐긴다. 벨기에의 마칠드 황태자비는 올 1월 승용차를 몰고 쇼핑에 나섰다가 자동차 열쇠를 잃어버려 차내에 둔 휴대전화를 도난당하기도 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댓글 0